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임시보호 지위’ 종료에 반대하는 기자회견 도중 한 엘살바도르 출신 여성이 울먹이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연합뉴스
“미국이 또 우리를 절망하게 만든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 시민 호세 과르다도의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엘살바도르인 20만여명에 대한 ‘임시보호 지위’를 박탈하고 유예기간 18개월을 거쳐 추방하기로 한 것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다. 반이민 드라이브를 거는 트럼프 행정부는 자연재해와 분쟁을 이유로 입국한 외국인들의 체류 근거가 되는 ‘임시보호 지위’를 출신국별로 철폐하는 중이다. 2001년 1월 지진으로 대피해 온 엘살바도르인들은 18개월 단위로 연장되던 이 지위의 종료로 17년 만에 추방 위기를 맞았다. 과르다도의 발언 중 ‘또’는 강대국 미국의 무게에 연속적으로 짓눌린 이 나라 현대사를 떠올리며 쓴 말이다.
<뉴욕 타임스>는 9일 미국의 정책 변화 하나가 중미의 약소국에는 큰 악몽이 되는 현실을 전했다. 현지인들의 불안은 구조적으로는 양국이 처한 상황의 심각한 비대칭에서 비롯된다. 잠정적 추방 대상자 20만명은 미국 인구의 0.061%일 뿐이다. 그러나 인구가 634만명에 불과하면서도 인구밀도는 높은 엘살바도르에는 큰 부담이다. 이들이 한꺼번에 귀국하면 7%에 이르는 실업률에 더 부담을 줄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모국에서 떨어져 살아온 사람들이 취업 등을 통해 잘 적응할지도 걱정이다. 어렸을 때 미국으로 갔거나, 미국에서 태어난 이들은 공용어인 스페인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엘살바도르의 해외 송금은 주로 미국에서 오는데, 지난해 수취액 46억달러는 국내총생산(GDP)의 17%에 이른다. 미국엔 ‘푼돈’인 송금액이 미국 경제의 0.14%에 불과한 엘살바도르 경제에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 불안과 인도주의적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추방 대상자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체류 자격을 지닌 자녀를 두고 와야 하는지 함께 귀국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어린 귀국자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조직에 가담하면 가뜩이나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은 살인사건 발생률 등 범죄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현지인들보다 부자인 귀국자들이 범죄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엘살바도르인들이 배신감을 토로하는 배경에는 미국의 정책이 이전부터 나라의 운명을 좌우해왔다는 인식도 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1980년부터 12년간 진행된 군사정부의 좌파 소탕전 과정에서 7만5천여명이 희생됐다. 미국은 군사정부와 우익 민병대의 잔학행위에 눈감은 채 돈과 무기, 군사고문단을 대며 중남미 군사정부들을 지원했다. 1980년에 군부의 잔학행위를 비판하다 미사 도중 살해된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의 얘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당시 엘살바도르 주재 미국대사관은 암살을 사주한 민병대장의 신원을 파악하고도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엘살바도르는 미국이 벌인 이라크전에 앞장서서 파병한 중미의 대표적 친미 국가이기도 하다.
미국이 엘살바도르를 또다시 휘청거리게 만든다고 비판하는 산살바도르 시민 과르다도는 “미국은 처음에는 수백만달러로 우리를 움직이더니 내전이 끝나자마자 우리를 버렸다”고 했다. 그는 내전 때 불어난 전투원들이 사회 복귀에 실패한 게 만연한 폭력의 주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엘살바도르의 치안 부재가 미국으로의 밀입국을 부추기고, 미국은 다시 자국에서 활동하는 폭력조직원들을 엘살바도르로 추방해온 관행이 양쪽에 사는 엘살바도르인들의 삶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퍼먼대의 에릭 칭 교수(역사학)는 “미국은 자국의 외교정책적 필요로 엘살바도르에 깊은 영향을 미쳐왔으며, 그만큼 책임이 있다”고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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