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주연상을 수상한 아지즈 안사리. 안사리는 이날 가슴에 ’타임스 업’ 핀을 달고 나왔다. 사진 내셔널 브로드캐스팅 컴퍼니(NBC) 갈무리.
‘그레이스’라는 가명의 한 여성이 미국의 유명 코미디 배우 아지즈 안사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온라인 매체에 폭로하면서 주요 언론이 기명 사설을 쏟아내는 등 미국 사회가 거센 논쟁에 휘말렸다. 지난 7일 안사리가 넷플릭스의 드라마 시리즈 <마스터 오브 제로>로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주연상을 수상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 14일 온라인 매체 <
베이브>는
“아지즈 안사리와 데이트를 했다. 내 인생 최악의 밤을 보냈다
”라는 제목의 폭로 기사를 보도했다. 해당 기사에서 신원 보호를 위해 ‘그레이스’라는 가명을 사용한 23살의 여성은 자신이 22살일 때 안사리와 보낸 하룻밤의 데이트를 매우 자세하게 전했다.
그레이스의 주장으로 구성된 기사의 중요한 내용만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브루클린에서 사진 작가로 활동하는 그레이스는 2017년 에미상 뒤풀이 파티에서 안사리를 만났다. 안사리는 처음에는 그녀에게 쌀쌀맞게 대했으나 그레이스가 자신이 가져온 카메라와 똑같은 1980년대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그날 안사리가 건넨 전화기에 자신의 번호를 남겼다.
문자 메시지로 약 한 주 정도 농담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첫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그녀는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었’으며 친구들에게 조언을 받아가면서까지 옷을 골랐다. 데이트 당일 안사리의 아파트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가볍게 와인을 마시고 허드슨 강에 있는 유명한 굴요리 전문점에 갔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와 함께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안사리는 키스를 하고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렸으며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자신 역시 옷을 벗었다.
그녀는 너무 빠르게 벌어진 일들에 불편함을 느끼고 “잠시 진정하고 쉬자”고 말했으나 안사리는 그녀에게 구강 성교를 해주고 자신에게 역시 같은 행위를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후 여러 차례 안사리는 성행위를 시도했고, 이에 그레이스는 불편함을 느끼고 그만두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섹스를 원하는 안사리에게 그녀는 “떠밀려서 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당신을 미워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안사리는 “당연하다. 두 사람이 함께 즐겨야 진짜 즐거운 거다”라고 대답했으나,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만지고 성적인 행위를 요구했다.
그레이스는 그의 행동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불편함을 떨치지 못했다. 결국 그레이스는 안사리의 손길을 뿌리치며 ‘너희 남자들은 다 똑같다’는 말을 남겼다. 안사리가 그녀를 위해 우버(콜 택시와 비슷한 모바일 차량 이용 서비스)를 불렀고, 이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레이스는 울었다. 그레이스는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이 불편하다는 사인을 행동과 말로 여러 차례 보냈으나 안사리가 이를 ‘눈치 채지 못했거나 알고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안사리가 “어젯밤에 즐거웠다”고 보낸 문자 메시지에 그레이스는 “당신은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 아니다. 내가 계속 거부의 사인을 보냈는데 당신은 이를 무시했다”며 “당신에게 이걸 확실히 알리는 이유는 또 다른 여자가 차를 타고 나오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해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한 발언으로 유명세를 탄 아지즈 안사리. 사진 유튜브 갈무리.
그레이스의 폭로를 보도한 매체 <베이브>는 “안사리는 34살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로 디지털 시대의 데이팅과 섹스에서의 미묘한 분위기에 대해 다른 대부분의 사람보다 많이 고민한 사람”이라며 “그는 이런 이야기로 <모던 로맨스>라는 책을 썼고, 그걸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안사리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한 바 있다. 특히 그가 2015년 미국 콜롬비아 방송 시스템(CBS)의 한 쇼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다. 사전을 찾아보면 페미니스트의 정의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약 당신이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고 믿는다면, 앞으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해야 한다”고 한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안사리는 이번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성폭력을 자행하고도 조용히 지나가던 시기는 이제 끝났다는 의미로 ’타임스 업’ 핀을 달고 참석하기도 했다.
■안사리의 행동 두고 ‘성폭력’ 여부 논쟁 일어
<베이브>의 보도 이후 안사리의 행동이 성폭력의 범주에 들어가는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베이브에> “(안사리와의 하룻밤이) 어색한 성 경험이었는지 성폭력이었는지를 두고 고민했다”며 “이 일이 성폭력이었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
애틀랜티스>와 <
뉴욕타임스> 등은 ‘후회한다고 해서 합의가 없었다고 말할 순 없다’는 식의 논조로 그레이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하이라인뉴스(HLN)의 호스트 애슐리 밴필드는 16일 방송에서 그레이스에게 “당신은 그의 행동을 저지하고 나서 일어나 나오지 않고 성적인 행동에 계속 동참했다. 당신 말대로 강간도 아니고 추행도 아니다”라며 “그렇다면 요점은 무엇인가? 안사리와 나쁜 데이트를 했다는 사실인가? 그게 공개 재판을 요할 만큼 중대한 피해이고 안사리의 커리어를 끝장낼 만한 일인가?”라고 반박했다. 안사리 역시 자신의 행동이 “성폭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반박 성명을 냈다. 안사리는 “지난해 9월, 파티에서 한 여성을 만나 번호를 교환했고, 서로 문자를 주고받다 데이트를 했다”고 사실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저녁식사를 하고 성적인 행위를 했으나 이는 완벽하게 합의하에 의한 행동이었다”고 밝혔다.
<베이브>의 폭로 보도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Metoo Movement)의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논란을 낳기도 했다. 유명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십여명의 배우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적인 행위를 강제한 과거 사건을 몇몇 여성 배우들이 폭로한 뒤 사회관계망서비스에는 ‘나도 당했다’는 ‘미투 운동’ 해시태그가 들불처럼 번졌다. 보수 언론들은 이번 <베이브>의 폭로 뉴스가 이런 ‘미투 운동’이 과도해지고 있다는 하나의 징조라고 해석했다.
<폭스뉴스>는 ‘아지즈 안사리의 성폭력 관련 보도는 미투 운동의 마지막이 왔다는 사인인가?’라는 기사에서 ‘여성들의 말을 믿어야 한다, 피해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나쁜 섹스와 폭력을, 미숙한 행위와 포식적 행위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데일리인텔리전서>는 ‘미투 운동의 과잉에 저항할 때가 됐다’며 “강간은 범죄지만 계속되는 지분거림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진보 성향의 언론도 이를 무분별한 폭로로 규정했다. <뉴욕타임스>는 “아지즈 안사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며 “(마지막에 그레이스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정리하면) 난 당신이 내 마음을 읽지 못해서 화가 났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보도 윤리의 면에서도 문제가 제기됐다. <애틀랜틱스>는 “그레이스와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기사로 쓴 기자가 만들어낸 것은 3000자 짜리 리벤지 포르노”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리벤지 포르노는 헤어진 연인이 복수를 위해 유포한 사적인 영상을 말한다. 영국의 진보 성향 일간지 <가디언>은 특히 <베이브> 쪽이 “기사를 내보내기 전에 안사리를 인터뷰 하지 않았으며 안사리 쪽에 알린 지 불과 다섯 시간만에 기사를 내보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공론화되어야 할 얘기가 나쁜 방법으로 표출 되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가디언>은 사설에서 “잘못된 아지즈 안사리의 폭로 기사는 기회를 차버렸다”고 해당 기사를 비판하면서도 “완벽한 세상이라면 그레이스가 안사리의 집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극도로 불편한 상황에서도 타인의 편안함을 우선시하도록 매우 강하게 사회화되어 왔다. 특히 어린 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전했다.
실제로 <베이브>의 원문 기사를 접한 20대 여성 ㄱ씨는 “어린 여성이 ‘노’라고 말하지 못하는 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며 “이 사건을 두고 더 많은 남성과 여성들이 섹스의 불편한 순간에 대해서, 합의의 중요성에 대해서 적의를 내려놓고 대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또 다른 여성 ㄴ씨는 “(온라인 매체 <베이브>의) 기사 전달 방식 때문에 정말 중요한 얘기가 묻혔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박세회 기자
sehoi.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