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왼손>, <어스시의 마법사>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공상과학소설(SF)의 거장 어슐러 K. 르 귄이 별세했다. 향년 88.
<뉴욕 타임스>는 르 귄이 22일 미국 포틀랜드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가족들은 정확한 사망원인을 밝히지는 않았지나 몇 달 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이 매체에 전했다.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과 <나니아 연대기>의 C.S. 루이스와 함께 세계 판타지 문학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르귄은 남성 영웅의 성장과 전투가 주요 서사인 기존 판타지 세계에 전형적인 성별이 없는 세계, 남성성이 강조되지 않은 남성 인물 등을 선보이며 판타지 세계에 페미니즘 감수성을 불어 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설 내 갈등 구도 또한 단순히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문화 간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갈등의 해법도 ‘우주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화해와 자기 희생으로 제시됐다. 르 귄의 저서는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고 전세계에서 수백만부가 판매됐다.
르 귄은 1929년 10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인류학자인 부모 밑에서 르 귄은 어린 시절부터 신화와 판타지에 매료됐지만 청소년기에 흥미를 잃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유는 판타지가 “백인 남성이 우주를 정복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만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르 귄은 1951년 래드클리프대학을 졸업해 이듬해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문학 관련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3년 결혼해 가족을 돌보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그는 역사학자인 남편 찰스와의 사이에 세 자녀를 뒀다.
르 귄의 첫번째 공상과학소설 <로캐넌의 세계>는 1966년에 출간됐다. 이 책은 문명 간의 충돌을 그리며 인류학적 판타지라는 평가를 받은 ‘헤인 우주 시리즈’의 첫 권이다. 2년 뒤에는 ‘어스시 시리즈’의 첫 권인 <어스시의 마법사>가 출판됐다. 1969년엔 정형화된 성별이 없는 세계를 그린 <어둠의 왼손>이 발간됐다. 르 귄은 이 소설이 인간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설계한 “사고 실험”으로 “젠더(사회적 성)를 제거하고 남는 것을 보고자 했다”고 <가디언>에 회상하기도 했다. 1971년 발간된 <하늘의 물레>는 유토피아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시한다는 평을 받았고 1980년과 2002년에 두 번 텔레비전용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르 귄은 20권이 넘는 소설, 100개가 넘는 단편을 발표했을뿐 아니라 시와 에세이도 집필하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다. 도교에 심취해 노자의 <도덕경>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는 다만 르 귄의 후기 저서들 중 일부는 교훈주의적 성격이 짙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보도했다.
르 귄은 <어둠의 왼손>으로 공상과학분야의 권위있는 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 수상하는 등 수많은 문학상을 섭렵했고 2014년에는 미국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인 ‘내셔널 북 어워드’에서 미국 문학에 대한 ‘공로상’을 수상했다. 수상식에서 그는 공상과학소설과 환상문학이 “오랫동안 문학계에서 배제돼 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출판사와 작가들이 이윤만 너무 강조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김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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