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분야 최대의 인수·합병(M&A)으로 추진돼온 싱가포르 업체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무산됐다. 철강 고율 관세 부과에 이어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국수주의가 확대 일로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트럼프 대통령이 12일 행정명령으로 브로드컴의 퀄컴에 대한 적대적 인수를 금지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퀄컴에 대한 매수를 금지한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본질적으로 이와 동등한 합병이나 인수도 금지한다”고 밝혔다. 또 “인수를 즉각적으로, 영구히 금지한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매출 기준으로 세계 6위 반도체 업체인 브로드컴은 무선통신 분야에 강점을 지닌 5위 업체 퀄컴의 인수를 추진해 왔다. 브로드컴은 퀄컴 쪽이 제시 가격에 동의하지 않자 1170억달러(약 124조6869억원) 규모의 적대적 인수를 추진해 왔다.
브로드컴의 시도를 검토한 미국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와 트럼프 대통령은 퀄컴 인수가 “미국의 국가 안보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사유를 들었다. 또 퀄컴의 5세대(5G) 무선통신 기술 개발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고, 브로드컴이 “제3의 외국 업체”와의 거래로 퀄컴의 자산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브로드컴은 무선 반도체의 20%를 애플에, 50%를 중국 업체들에 공급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2일 백악관에서 본사 미국 이전 계획을 밝히는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를 격려하고 있다. 워싱턴/UPI 연합뉴스
미국 대통령이 행정명령으로 미국 내 자산 인수를 저지한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그 중 두 번을 트럼프 대통령이 했다. 그는 지난해 9월에도 중국 자본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캐년브리지캐피털의 래티스반도체 인수를 행정명령으로 중단시켰다. 지난 1월에는 송금 서비스 업체 머니그램을 사려던 중국 알리바바그룹 자회사의 시도가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의 반대로 좌절됐다.
미국 행정부가 외국 기업과 자본의 미국 자산 인수를 가로막은 사례들은 대체로 중국 견제 의도와 연결된다. 퀄컴 인수 시도는 싱가포르 업체가 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기술이 중국 쪽으로 넘어가거나 중국 업체들이 5세대 무선통신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는 중국이 4세대보다 20배 빠른 5세대 무선통신 기술에서 앞서갈 경우 안보에 가해질 위험을 평가한 보고서가 올해 초 백악관에서 회람됐다고 전했다. 더구나 퀄컴 주주들이 브로드컴의 제안을 수용할지 검토하고 있는데도 행정부가 거래를 금지시킨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본사를 미국으로 옮길 계획까지 밝히며 퀄컴 인수를 추진한 브로드컴은 뒤통수를 맞은 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기자회견까지 열며 자신의 경제 정책의 승리라고 홍보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를 선택해줘서 아주 고맙다”며 탄 최고경영자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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