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지난달 2일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브리핑하고 있다. 볼턴 보좌관은 10일 ‘연방주의자 협의회’ 연설에서 국제형사재판소 무력화 방침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워싱턴 사무소도 폐쇄 계획을 밝혔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전쟁 범죄 혐의로 미국인들을 기소하면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제재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 기구와 협정을 무시하거나 탈퇴하는 것은 다반사이지만, 이번에는 국제법적 정의를 추구하는 기관을 제재한다며 힘으로 위협한 점에서 더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은 10일 보수단체인 ‘연방주의자 협의회’ 연설에서 국제형사재판소를 ‘비합법적 법원’으로 규정하고 이 기관과 절대 협력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볼턴 보좌관은 “국제형사재판소의 권위는 부적절하고 미국의 주권을 침해한다. 아프간전과 관련한 미군 범죄는 전혀 근거가 없다. 우리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절대 가입하지 않고,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겠다. 스스로 사라지도록 내버려두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만약 재판소가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비롯한 다른 동맹국을 건드린다면 조용히 앉아있지 않겠다. 국제형사재판소 판·검사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고, 그들의 미국 내 자금을 제재하며, 미국 형사법에 따라 그들을 기소하는 등 우리 국민과 동맹국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쓰겠다”고 경고했다. 볼턴 보좌관은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된 뒤 유죄 판결은 8건밖에 없고, 시리아·수단 등의 잔혹 행위를 막지 못한다며 재판소 무용론까지 제기했다.
집단 학살 등 반인도 범죄 처벌을 위해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는 브룬디·중앙아프리카공화국·수단 등 주로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다뤄왔다. 이 때문에 당사자들한테 ‘서구의 정의’만을 위한 기구라는 말도 들었으나, 미국은 각지에서 전쟁을 벌이는 자국군이 처벌받을 것을 우려해 설립 조약인 로마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제형사재판소가 아프간전과 이라크전의 전쟁 범죄에 가담한 미군 등에 대한 조사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자 제재까지 거론하며 반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볼턴 보좌관은 또 20여년간 유지돼온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워싱턴 대표부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이 지난달 유엔 산하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 대한 지원금 집행을 전면 취소한 것에 이어 내놓은 강경책이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워싱턴 대표부는 1994년 개설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미국 내 비공식 대사관 역할을 해왔다. 앞서 미국 국무부는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지난해 9월 유엔총회에서 국제형사재판소에 이스라엘 당국에 대한 기소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대표부 폐쇄를 경고한 바 있다.
볼턴 보좌관은 “미국은 항상 우리의 친구이자 동맹인 이스라엘 편에 설 것”이라며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의미 있는 협상에 착수하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워싱턴 사무소를 계속 열어둘 순 없다”고 말했다. 이에 사에브 에라카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사무총장은 “트럼프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집단적 탄압을 시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비호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국제형사재판소 (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중대 범죄(집단학살·인도주의에 대한 범죄·전쟁범죄 등)를 저지른 개인을 국제법에 따라 처벌하기 위한 상설 국제법원이다. 120개 국가가 채택한 로마조약에 따라 200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됐다. 한국은 2003년 2월 정식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