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투자가이자 자유주의적인 활동가인 조지 소로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트럼프 및 미국 우익들의 대표적 공적으로 비난받고 있다. 조지소로스닷컴 갈무리
최근 미국에서 잇따르는 인종주의적 극우세력의 테러를 추동하는 음모론에서 대표적인 주인공은 국제투자가인 조지 소로스(88)이다.
소로스 및 민주당 정치인 등에게 폭발물 소포를 보낸 용의자 세자 세이옥이나, 피츠버그 유대교 회당에서 총기를 난사한 로버트 바워스는 모두 자신들의 소셜미디어에 소로스가 미국과 백인들을 무력화시키는 원흉이라며 각종 콘텐츠를 게시했다.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인 세이옥은 지난해 플로리다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의 생존 학생으로 총기 규제 운동을 펼치는 데이비드 호그가 “엉터리 사기꾼”이며 소로스한테 돈을 받는 허수아비라고 비난했다. 바워스는 백인민족주의자, 신나치, ‘대안우익’ 등이 선호하는 소셜미디어인 ‘갭닷컴’에서 미국 백인과 “서구 문명”이 “확실한 소멸로 향하고 있다”며 유대인과 무슬림들에 그 책임을 묻는 글들을 올렸다. 그는 미국의 유대인과 무슬림의 배후가 소로스라고 시사하는 각종 콘텐츠들을 올렸다.
소로스가 우파 음모론에서 원흉의 하나로 거론된 것은 오래됐다. 이는 그가 과거에 영국 파운드화를 폭락시키는 등 외환 투기꾼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다, 민주당 등 자유주의적 정치세력과 소수집단에게 관대한 기부를 하는 그의 정치 성향에서 연유된다. 미국 극우세력들은 외환투기꾼인 소로스를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을 매수해서 미국 등 국가를 무력화하고, 자본의 세계 지배를 꾀하는 ‘글로벌리스트’의 수괴로 묘사한다.
최근 미국의 대표적 극우 세력 음모론인 ‘백인 대학살’ 및 ‘글로벌리스트 지배’ 담론은 소로스를 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글로벌리스트 자본가들과 유대인들이 이민을 통해 백인을 소수로 만드는 미국의 주류적 인구 변화를 꾀해, 주도세력을 교체하려 한다는 음모론들이다.
특히, 소로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전후해서 미국 우익세력들의 대표적 공적으로까지 부상했다. 이는 트럼프가 앞장서서 그를 비난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대선 마지막 광고에서 유대인들인 소로스,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인 로이드 블랭크페인,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의 글로벌리스트 삼각동맹을 거론했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세계 권력구조를 장악하려는 이 동맹에 협력자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도 트럼프는 줄곧 소로스가 자신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이나 활동가에게 돈을 주고 매수하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트럼프는 최근 브렛 캐버노 대법관 인준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소로스의 돈을 받고 있다고 비난했다. 케빈 매카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도 지난 23일 트위터에서 소로스, 환경운동을 하는 억만장자 톰 스타이어, <블룸버그뉴스>의 소유주인 뉴욕 기업인인 마이클 블룸버그가 민주당을 지원해 “선거를 매수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와 미국 극우세력들이 최근 미국 안보를 위험한다고 비난하는 중미 이민자 행렬인 ‘카라반’에 소로스가 관련됐다는 음모론이 퍼지면서 미국 우익들은 그를 더욱 공격하고 있다. 카라반 행렬이 미국으로 북상하던 지난 3월 트위터에 오른 한 글은 “1500명의 중미 이주자 가족 카라반이 멕시코를 넘어서 미국 국경에 도달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이 더 많은 분열을 야기하려고 소로스 그룹들에 의해 조직됐다”고 주장했다.
헝가리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인 소로스는 그동안 자신의 자선단체인 오픈소사이어티재단에 320억달러의 기부를 해왔다. 그는 냉전 시절 동구권의 민주화 활동을 정력적으로 지원하는 등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철저한 시장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이다.
하지만, 세계화에 대한 불만은 그를 대표적인 글로벌리스트로 낙인찍게 만들었고, 유대계라는 그의 출신과 자유주의적 기부 성향과 결합돼 미국 우익들의 표적이 됐다. 그를 국제적인 인물로 만든 사건은 1992년 영국 정부도 손을 들게 한 파운드화 환율 공격이었다. 당시 소로스는 자신의 퀀텀펀드 등을 통해서 100억파운드 이상의 투매를 했고, 이는 영국 파운드화 환율 체계를 붕괴시키는 사태까지 치달았다.
소로스는 당시 영국 파운드화가 유럽환율체계(EERM) 내에서 다른 유럽 국가의 통화에 비해 고평가된 데다, 금리도 지나치게 낮아서 지속 불가능한 불균형 상태임을 간파하고 파운드화 투매 공세를 벌였다. 당시 영국의 인플레는 독일에 비해 3배나 높고 금리는 낮은데도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를 인위적으로 고평가로 유지시켜왔다. ‘검은 화요일’이라 불린 9월16일 소로스의 파운드 투매 공세가 절정에 오르자, 결국 영국은 유럽환율체계에서 탈퇴하고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했다. 소로스는 약 10억달러를 벌었고, 영국은 환율을 방어하려다 34억파운드를 손해본 것으로 평가됐다.
소로스는 1997년에도 타이와 말레이시아 통화를 상대로 환투기를 해, 마하티르 모하멧 말레이 총리가 아시아 외환위기를 부른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소로스는 자신들은 타이 통화 폭락으로 시작된 아시아 외환위기 전에 이미 아시아 통화 등을 팔았고, 정작 외환위기가 시작됐을 때는 오히려 타이·말레이 통화를 매입했다고 해명했다.
환투기꾼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소로스는 영국 파운드화 사태나 아시아 외환위기는 시장의 불균형이 초래한 것으로, 자신이 아니어도 그 사태는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명한다. 소로스는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부터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국제적인 환투기로 의심될 만한 거래를 중단해왔다.
특히, 그는 지난친 시장주의를 비판하며, 정부 및 공공분야의 역할과 개입을 주장해왔다.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 확산과 소수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단체 및 활동 등에 거액의 지원도 해왔다. 그의 오지랖 넓은 기부와 정치사회 활동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극우 세력의 표적이 됐다.
그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나치의 박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다. 나치 치하에서 그는 고작 10대 초반이었는데도, 우익들로부터 나치의 협조자라는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