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해 1월30일 의회에서 국정연설을 할 때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과 얘기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번에는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과의 설전에 나섰다. 거슬리는 대상은 국내외와 피아를 가리지 않는 그의 공격에 미국 국가 제도의 핵심인 사법부의 독립성도 시험대에 올랐다.
발단은 20일 샌프란시스코 연방지방법원의 결정이다. 이 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카라반’(중미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집단 이주자 행렬)을 겨냥해 취한 행정명령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허가받지 않고 국경을 넘으면 난민 신청 자격을 주지 않도록 했지만, 법원은 “이민국적법은 미국에 도착하는 외국인은 지정된 입국 장소로 들어왔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망명 신청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에게 법원 결정에 “매우 불만이 크다”고 했다. 그는 “이건 오바마의 판사가 결정한 거다.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다. 대법원에서는 (우리가) 이길 거다”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을 제소하고 싶은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건을 제9 순회법원에 가져간다. (정부는) 어떻게 하든 지게 돼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결정이 연방지방법원에서 나온 것인데도 역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상급 법원인 제9 연방순회항소법원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러자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21일 성명을 내어 “오바마의 판사들이나 트럼프의 판사들, 부시의 판사들이나 클린턴의 판사들이란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우리한테는 그들에게 오는 사람들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온 힘을 쏟는 비범한 판사들만 있다. 우리는 사법 독립에 감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추수감사절 휴가차 마러라고 리조트에 머무는 트럼프 대통령은 발끈했다. 그는 트위터에 “존 로버츠 대법원장,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에겐 정말로 ‘오바마의 판사들’이 있다. 그들은 나라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들과 매우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고 썼다. 이어 “(행정부의) 결정 79%가 제9 순회법원에서 뒤집혔다. 끔찍하고 위험한 오점이다. 제9 순회법원을 2개나 3개로 쪼개는 걸 토론해보자. 너무 크다!”며 법원 해체 필요성까지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다반사이지만, 그 대상이 사법부 수장인 점은 매우 이례적이다.
연방대법원장이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반박하는 성명을 낸 것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둘은 같은 편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이번 설전이 더 주목을 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불과’ 50살 때인 2005년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이 임명한 인물이다. 종신직인 연방대법원장으로 그를 낙점한 것을 두고 공화당이 장기적으로 사법부를 유리하게 끌고가려는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지난 13년간 거의 대부분의 사건에서 보수 쪽 편을 들었다. 지난해 무슬림 국가 시민 입국 금지령 사건에서도 하급심의 잇따른 중단 명령을 대법원이 5 대 4로 뒤집을 때 트럼프 대통령 편에 섰다.
그런 로버츠 대법원장이 성명을 낸 것은 판사 개인에 대한 공격과 사법 독립성 침해 발언에 침묵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 타임스>는 대법원장을 비롯한 9명의 대법관 진용에서 정가운데에 있으면서 균형추 역할을 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7월에 퇴임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제 대법원장으로서 이념 지형의 중도 지대를 보살펴야 하는 입장이라서 동료들이나 사법부 전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성폭행 의혹에도 불구하고 브렛 캐버노 지명자를 끝내 대법관으로 앉히면서 사법부에 ‘내 사람’을 심겠다는 의도를 뚜렷이 드러내왔다.
트럼프 대통령과 로버츠 대법원장은 서로 껄끄러운 대목이 있긴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운동 때 로버츠 대법원장이 “완벽한 재앙”이라고 비난했다. 대법원이 2012년 건강보험 수혜자를 대폭 늘린 ‘오바마 케어’가 문제없다고 판단했을 때 로버츠 대법원장이 다수파에 가담했다는 이유에서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자신의 반이민 드라이브를 법원이 번번이 차단하는 것에 약이 올라 다시 금지선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말다툼을 하다 백악관 출입을 금지당한 <시엔엔>(CNN) 기자가 낸 소송에서 법원이 기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 판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사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존폐를 논할 정도로 미워하는 제9 연방순회항소법원은 캘리포니아 등 9개 주를 관할한다. 자유주의적 풍조가 강한 서부 해안 지역의 특성 때문에 법원도 그런 색채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5년만 보면 이 법원에서 정부 패소 확률은 12개 연방순회항소법원들 중 4위에 해당한다고 전했다.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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