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22 16:15
수정 : 2019.05.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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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은 것을 기념하는 무지개색 조명이 백악관 건물을 비추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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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남성 부부, 난자 기증 받아 대리모 해외 출산
정부 “생물학적 혈연 없다” 시민권 부여 거부
11개월 딸은 미국 체류 위해 비자 갱신 되풀이
레즈비언 쌍둥이도 ‘아빠’ 국적 따져 한 아이만
법원 “경직된 법 해석” 지적…시민권 인정 확대
NYT “1950년대 법률과 21세기 가족 불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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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은 것을 기념하는 무지개색 조명이 백악관 건물을 비추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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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동성 부부가 외국인에게 기증 받은 정자와 난자를 인공수정해 미국 바깥에서 낳은 아이는 미국 시민일까, 아닐까?
미국 태생의 제임스 마이즈(38)와 영국 태생의 조너선 그레그는 2015년 결혼한 게이(남성 동성애자) 부부이자 미국 시민권자다. 이들은 '남편'인 그레그의 정자와 기증받은 난자를 시험관에서 인공수정해 지난해 6월 영국에서 예쁜 딸을 얻었다. 그러나 지난달 미 국무부는 이 신생아를 미국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시민권 부여를 거부했다. 마이즈-그레그 부부는 연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공 임신이 늘고 결혼과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개념도 급변하고 있지만 법률이 이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동성 부부의 신생아들이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는 일이 미국에서 뜨거운 논쟁을 낳고 있다. 부모-자식의 혈연 관계를 시민권 인정의 필수 조건으로 규정한 현행법이 신생아를 무국적 투명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뉴욕 타임스>는 21일 “1950년대의 법령과 21세기의 가족 개념”이 부합되지 않는 현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미국 수정헌법은 부모의 국적에 상관 없이 미국에서 태어나면 자동으로 미국 국적을 주도록 했다. 속지주의 원칙에 따른 출생시민권 제도다. 해외에서 태어나는 경우엔 이민·국적법을 적용해 부모와 자녀의 생물학적 혈연성이 입증돼야 시민권을 부여한다. 마이즈-그레그 부부의 아이는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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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태생의 제임스 마이즈(왼쪽)와 영국 태생의 조너선 그레그는 합법적인 게이 부부이자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기증 받은 난자로 대리모에게서 출산한 딸이 미국 시민권 부적격자라는 현행 규정 탓에 상심이 깊다고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H6뉴욕 타임스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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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지난 2월 미 연방법원은 미국 시민권자와 이스라엘 국적의 남성 게이 커플이 각각 자신의 정자와 기증받은 난자로 캐나다에서 대리모를 통해 낳은 쌍둥이 모두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애초 미국인 아빠의 아이만 시민권이 인정되면서 쌍둥이의 운명이 갈렸으나, 법원이 “국무부의 이민법 해석이 경직됐다”며 바로잡았다. 국무부가 즉각 항소해 2심이 진행 중이다.
대리모가 필요 없는 여성 레즈비언 부부라고 예외는 아니다. 올해 초 미국인-이탈리아인 여성 커플은 기증받은 정자로 각각 하나씩 두 자녀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미국인 엄마의 아이에게만 시민권을 주자 소송을 냈다. 지난주 연방법원은 “이 가족의 곤경이 끔찍하고 터무니 없다”며 소송을 받아들였다.
현재 미국 정부가 해외 출생자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판단 기준인 이민·국적법은 1952년 제정됐다. 그러나 당시엔 인공임신 기술이 개발되기 전인데다 동성결혼 합법화도 먼 미래 이야기였다. 1990년대 말에야 인공수정 출생아의 시민권 정책을 도입하면서 부모의 출신지와 생물학적 친연성을 뼈대로 새로운 법 해석을 내놨다. 신생아가 미국과 충분한 연관성이 있느냐가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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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만의 한 여성 동성애 커플이 타오위안의 불교 사원에서 결혼식을 하면서 불상 앞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 도장을 찍고 있다. 대만 입법원(의회)은 21일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특별법안을 통과시켜, 오는 24일부터 동성 커플도 혼인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타오위안/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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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준에 따르면, 결혼한 미국인 부모의 정자와 난자로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혼외’ 출산으로 간주돼, 그 아이의 생물학적 부모가 최소 5년 연속 미국에서 거주한 미국 시민권자라야 한다는 추가 기준이 적용된다. 마이즈의 영국 태생 남편 그레그는 이 기간을 채우지 못한다. 머서대학의 스콧 팃쇼 교수(법학)는 “이민국적법의 시민권 정책은 ‘결혼’에 대한 현재의 이해와 충돌하며, 더 중요하게는 ‘부모’에 대한 오늘날 법적 정의와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앞서 버락 오바마 정부는 미국 시민권자인 레즈비언 부부의 경우 한 파트너가 제공한 난자와 기증받은 정자의 인공수정난을 다른 파트너가 임신할 경우 ‘혼인한 부부의 출생아’로 인정해 미국 시민권을 인정하도록 했다. 하지만 남성 동성 부부의 경우엔 이런 규정의 혜택도 기대할 수 없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딸의 남성 ‘엄마’인 마이즈는 아이의 미국 체류 연장을 위해 영국을 왕복하며 여행자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 그는 “우리가 생활하는 곳도, 직장이 있는 곳도 여기(미국)인데 우리 딸은 여기 있을 수 없고,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없다”며 딸이 겪을 심리적 트라우마와 미래를 걱정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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