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없는 고향집 열쇠만 반들반들
전쟁에 떠밀려 전체인구 70%가 난민
전쟁에 떠밀려 전체인구 70%가 난민
일요일인 지난달 18일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라말라 인근의 잘라존 난민촌을 찾았다. 이 곳에서 아스마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스마는 비르젯대학에 다니는 학생인데 2년 전 결혼해 한 살된 딸을 둔 젊은 엄마다. 그는 잘라존 난민촌에서 태어났고, 난민촌에서 자랐으며, 같은 난민촌의 남자와 결혼해 여전히 난민촌에서 산다. 그의 부모와 시부모 역시 잘라존 난민촌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고 있다. 아스마는 팔레스타인 난민 3세인 셈이다.
할아버지가 60여년 전에 떠나온 고향에 아스마는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디쯤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릴 수 있다. 자신의 부모가 그렇듯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언젠가 돌아가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세계 난민 세 명 중 한 명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팔레스타인 약 700만명, 전체인구의 70%는 난민으로 살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첫번째 난민은 1948년 5월에 시작된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군사공격과 민간인 대량학살 소식을 듣고 안전한 곳을 찾아 피난을 떠났다. 1949년 전쟁이 끝난 후 85%의 팔레스타인 땅이 이스라엘 땅이 돼버리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난민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를 독립전쟁이라고 부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알 나카바’(재앙)이라고 부른다.
두번째 난민들은 67년 전쟁 기간 중 요르단, 레바논 등으로 피난을 떠난 사람들이다. 이후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 가자지구가 이스라엘 군사점령 아래 놓이면서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만 19개의 난민촌이 있다. 또 가자지구에 8개 등 군사점령 지역 내에 28개의 난민촌이 있다. 이웃 아랍국가 요르단에 10개, 시리아에 10개, 레바논 12개 등 모두 59개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공인된 팔레스타인 난민촌이다. 이란·이라크·이집트 등 다른 아랍국에도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많이 있지만 이들은 등록되지 않은 난민들이다.
라말라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거리인 잘라존 난민촌, 아스마의 집을 찾아가던 날은 겨울비가 내렸다. 타고온 작은 미니버스는 난민촌 입구에서 멈췄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모든 난민촌이 그렇듯 잘라존 난민촌도 길이 좁아 차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고, 좁은 골목길은 하수시설이 잘 되어있지않아 진흙범벅이었다. 동네 입구, 작은 구멍가게에 가서 아스마의 집을 물으니 주인 아저씨가 아들을 불러 아스마 집까지 안내해주라고 한다. 비를 맞으며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앞서 걷는 꼬마가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민촌은 작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미로여서 여러번 왔던 길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다시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잘라존에는 현재 1만1000여명의 난민이 살고 있다. 지금은 이스라엘 땅이 된 예전 아랍 마을에서 함께 살던 사람들이 주로 같은 난민촌에 모여 산다. 때문에 난민촌은 큰 가족공동체와 다름없다. 이제는 고향에서 태어난 사람 보다 난민촌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더 많다. 하지만 난민촌을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노인이든, 어린이든, 자신들 혹은 자신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난민촌의 어린이들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모든 어린이들은 60여년 전, 자신들의 증조 할머니, 할아버지가 떠나온 고향 마을의 이름을 정확히 말한다.
여러 골목을 지나고 한참을 올라가서 아스마 집에 도착했다.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비롯해 시누이 5명과 이웃 아낙들까지 둘러 앉아 크라스라는 아랍 만두를 빚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것이 마치 명절날 집에 온 느낌이었다. 나도 함께 끼어앉아 만두를 빚으니 동네 꼬마들까지 모여들어 구경이 났다. 할머니는 다 익은 만두며 차, 과일 등을 내 앞으로 들이밀며 어서 먹으라고, 더 먹으라고 자꾸 권한다.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설을 보낼 수 없는 외로움을 덜어 주었다. 만두를 다 빚고 차를 마시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고향 이야기를 부탁드렸다. 두 분은 고향 마을을 그림 그리듯 선명히 묘사했다. “피난 당시 22명의 가족이 함께 고향을 떠났는데 모두 그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마을 이름을 히브리어로 바꾸었다고 우리가 태어난 땅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두 분은 고향을 떠날 때 갖고온 집 열쇠를 보여줬다. 60여년 동안 사용한 적 없는 열쇠는 녹슨 열쇠가 아니라 오늘 사용한 열쇠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난민촌의 가족은 이렇게 모두 자신들의 옛 열쇠를 하나씩 지니고 오늘도 문을 열고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난민촌은 자신들의 땅을 잃어버리고 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임시로 모여 사는 곳이다. 세계 여러 곳에서 매년 수천명의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계 난민들과 달리 팔레스타인 난민은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여전히 난민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루어진 모든 주요 평화협정은 난민들은 자신의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또 난민들의 집과 재산을 되찾을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 후 500여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을 파괴하고 마을 이름도 히브리어로 바꾸었다. 1950년 부재자 재산법을 만들어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재산은 이스라엘 국가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1952년 국민법으로 팔레스타인 난민은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못박아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다. 이는 모두 국제법으로는 용인되지 않는 것들이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국제법 아래에서는 새로운 국가가 세워질 때, 이전에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당연히 새로 세워진 국가의 시민들로 인정된다. 당시 추방됐던 사람들도 이후에는 시민이 된다. 실제로 1947년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 즉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나눈다는 분리안에서도 새로 세워질 유대 국가에 전체 토지의 56%를 할당하되 인구는 유대인과 아랍인을 같은 수로 포함시키고, 팔레스타인 국가에는 다수의 아랍인과 약간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두 나라로 분리시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추방하고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새로운 국가는 애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나이든 사람들이 모두 죽으면 다음 세대들은 고향을 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아랍 문화에서 고향과 집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땅은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는 땅의 일부이다. 우리 난민들의 귀환이 바로 이 지역의 평화를 의미한다.” 아스마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여러 골목을 지나고 한참을 올라가서 아스마 집에 도착했다.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비롯해 시누이 5명과 이웃 아낙들까지 둘러 앉아 크라스라는 아랍 만두를 빚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것이 마치 명절날 집에 온 느낌이었다. 나도 함께 끼어앉아 만두를 빚으니 동네 꼬마들까지 모여들어 구경이 났다. 할머니는 다 익은 만두며 차, 과일 등을 내 앞으로 들이밀며 어서 먹으라고, 더 먹으라고 자꾸 권한다.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설을 보낼 수 없는 외로움을 덜어 주었다. 만두를 다 빚고 차를 마시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고향 이야기를 부탁드렸다. 두 분은 고향 마을을 그림 그리듯 선명히 묘사했다. “피난 당시 22명의 가족이 함께 고향을 떠났는데 모두 그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마을 이름을 히브리어로 바꾸었다고 우리가 태어난 땅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두 분은 고향을 떠날 때 갖고온 집 열쇠를 보여줬다. 60여년 동안 사용한 적 없는 열쇠는 녹슨 열쇠가 아니라 오늘 사용한 열쇠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난민촌의 가족은 이렇게 모두 자신들의 옛 열쇠를 하나씩 지니고 오늘도 문을 열고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난민촌은 자신들의 땅을 잃어버리고 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임시로 모여 사는 곳이다. 세계 여러 곳에서 매년 수천명의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계 난민들과 달리 팔레스타인 난민은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여전히 난민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루어진 모든 주요 평화협정은 난민들은 자신의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또 난민들의 집과 재산을 되찾을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 후 500여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을 파괴하고 마을 이름도 히브리어로 바꾸었다. 1950년 부재자 재산법을 만들어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재산은 이스라엘 국가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1952년 국민법으로 팔레스타인 난민은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못박아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다. 이는 모두 국제법으로는 용인되지 않는 것들이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국제법 아래에서는 새로운 국가가 세워질 때, 이전에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당연히 새로 세워진 국가의 시민들로 인정된다. 당시 추방됐던 사람들도 이후에는 시민이 된다. 실제로 1947년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 즉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나눈다는 분리안에서도 새로 세워질 유대 국가에 전체 토지의 56%를 할당하되 인구는 유대인과 아랍인을 같은 수로 포함시키고, 팔레스타인 국가에는 다수의 아랍인과 약간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두 나라로 분리시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추방하고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새로운 국가는 애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나이든 사람들이 모두 죽으면 다음 세대들은 고향을 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아랍 문화에서 고향과 집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땅은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는 땅의 일부이다. 우리 난민들의 귀환이 바로 이 지역의 평화를 의미한다.” 아스마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이승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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