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추정 세력에 납치된 한국인들을 풀어내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에 총력을 가하고 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전망이다.
우선 아직 한국인들이 정확하게 어떤 세력에 의해 어디에 붙잡혀 있는 지가 확실하지 않다.
탈레반 대변인 역할을 해온 카리 유수프 아마디가 한국인 납치 사실을 밝힌 점 등에 비춰 우리 정부도 일단 납치세력을 탈레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해 이들이 서방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평소 행태와 달라 또 다른 무장단체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전언이다.
송민순 외교장관도 21일 브리핑에서 "무장단체의 입장이 공식 접수되지는 않았다"면서 "들어오는 조건은 미확인, 비공식적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현 상황이 정부로서도 피랍된 한국인들을 풀어내기 위해 어떤 세력과 접촉하고 어떤 식으로 협상을 준비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 수립이 어려운 상태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특히 탈레반은 2002년 미국 등 서방 동맹군의 공격으로 정권이 붕괴된 이후 아프간내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산발적인 투쟁을 전개해와 명확하고 일사불란한 지휘계통이나 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탈레반과 정서적으로 가까운 지방의 군벌이나 지주들도 `범 탈레반계'로 통칭되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납치한 세력의 정체와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옛 탈레반 정권의 통치구조 = 지난 1994년 옛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뒤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라는 젊은 수니파 신학자에 의해 조직된 탈레반은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지 않는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이 정치나 정당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
대신 탈레반 지도자의 정통성은 초기 무슬림들이 예언자 모하메드에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인 `충성 서약'에 기반했다.
탈레반 최고 지도자인 오마르는 지난 1994년 4월4일 신전에 보관돼 있던 모하메드의 `성의(聖衣)'를 걸친 상태에서 한 건물의 지붕에 올라갔고 이때 수 백명의 신학자들은 "`아미르 알-무미닌(충성스런 신도들의 사령관)'을 연호했다. 사실상의 충성서약이었던 셈이다. 1천400년 전 모하메드가 살았던 시대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이들은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탈레반은 정권 수립 후에도 국가기관이나 명확한 통치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 행정부 관리나 군인들에게 식료품과 의복, 총만 지급할 뿐 월급을 주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책발표와 기자회견을 거의 갖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언젠가부터 사진촬영도 금지하고 있어 외부세계는 물론 대부분의 아프간 국민들도 탈레반이 누구인 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집권 당시 2만5천-3만명으로 추정되는 정규군이 전통적인 `부족군대'로 편제돼 있으며 필요에 따라 숫자가 늘어나기도 했다다. 당시 각료급 인사들은 주로 마드라사(신학교)에서 공부한 신학자들이며, 보건장관이나 국영은행 총재 등 일부는 대소련 항전 야전사령관의 경험도 갖고 있었다. 정부 차원의 예산도 따로 편성되지 않았고 전쟁에 필요한 모든 자금은 오마르가 직접 모금해 집행하지만 이 역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 탈레반은 `법과 질서의 회복'을 주창하며 좋은 정부가 들어서면 언제든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지만 1996년 실질적인 통치세력으로 발돋움한 이후에는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또 칸다하르 시절 이들의 의사결정 구조는 초기 이슬람의 모델이자 파슈툰족의 부족회의인 `지르가(jirga)'와 같은 형태였으나 세력이 확장된 이후에는 협의절차 없이 오마르가 전적으로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오마르는 과거와 달리 중대결정을 앞두고서도 다른 지역을 방문하지 않았고 집권기에 수도 카불을 갔던 것도 2차례에 불과했다. ◇ 정권 붕괴 뒤 지휘체계 = 미군의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 오마르는 파키스탄의 퀘타나 발루치스탄주(州)에 은신한 상태에서 지하드(성전)을 막후에서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행동반경이 자유롭지 못한 그는 효율적인 지휘를 위해 지역별로 작전권을 부여받은 사령관을 임명, 미군 및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과의 전쟁을 독려하고 있다. 지난 5월 외다리로 탈레반의 야전 사령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물라 다둘라가 남부 헬만드주에서 미군과의 교전중 총상을 입고 사망하자 그는 "성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점령군에 대한 전사들의 공격은 계속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 지도부 회의를 직접 주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미국이 약속했던 경제개발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다 대 테러전의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면서 과거 탈레반과 일정한 거대를 뒀던 군벌이나 양귀비 재배 지주들도 속속 탈레반에 편입되거나 동조세력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범 탈레반계는 무차별적 테러나 납치행각을 저지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지역이나 세력별로 충성심이나 이념, 성향 등에서 차이가 있다. 일부는 알-카에다 계열이다. 이렇게 복잡한 지휘체계와 분파 때문에 외국인 납치사건 등이 일어날 경우 실행 집단을 둘러사고 논란이 일기도 한다. 자신을 탈레반 대변인이라고 밝힌 카리 유수프 아마디가 20일 AFP와의 전화통화에서 독일이 아프간 주둔군을 철수시켜야 인질 2명을 풀어주겠다고 밝혔지만 전날에는 자베울라흐 무자히드라는 다른 대변인이 탈레반은 독일인 납치에 관해 아는 바 없다고 밝혀 독일 정부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그 대표적 사례다. 우리 정부가 납치세력이 진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무엇보다도 그들의 정체 파악을 서둘러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한국인을 납치했다고 처음 알린 이후 살해 경고까지 한 카리 유수프 아마디가 언젠가부터 꾸준히 탈레반의 입 노릇을 해왔고, 특히 지난 3월 납치됐다 석방된 이탈리아 기자 대니얼 마스트로쟈코모의 사건에서도 대 언론 창구였다는 점에서 현재로서는 한국인들이 정통 탈레반 세력에 납치됐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wolf85@yna.co.kr
탈레반 최고 지도자인 오마르는 지난 1994년 4월4일 신전에 보관돼 있던 모하메드의 `성의(聖衣)'를 걸친 상태에서 한 건물의 지붕에 올라갔고 이때 수 백명의 신학자들은 "`아미르 알-무미닌(충성스런 신도들의 사령관)'을 연호했다. 사실상의 충성서약이었던 셈이다. 1천400년 전 모하메드가 살았던 시대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이들은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탈레반은 정권 수립 후에도 국가기관이나 명확한 통치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 행정부 관리나 군인들에게 식료품과 의복, 총만 지급할 뿐 월급을 주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책발표와 기자회견을 거의 갖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언젠가부터 사진촬영도 금지하고 있어 외부세계는 물론 대부분의 아프간 국민들도 탈레반이 누구인 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집권 당시 2만5천-3만명으로 추정되는 정규군이 전통적인 `부족군대'로 편제돼 있으며 필요에 따라 숫자가 늘어나기도 했다다. 당시 각료급 인사들은 주로 마드라사(신학교)에서 공부한 신학자들이며, 보건장관이나 국영은행 총재 등 일부는 대소련 항전 야전사령관의 경험도 갖고 있었다. 정부 차원의 예산도 따로 편성되지 않았고 전쟁에 필요한 모든 자금은 오마르가 직접 모금해 집행하지만 이 역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 탈레반은 `법과 질서의 회복'을 주창하며 좋은 정부가 들어서면 언제든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지만 1996년 실질적인 통치세력으로 발돋움한 이후에는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또 칸다하르 시절 이들의 의사결정 구조는 초기 이슬람의 모델이자 파슈툰족의 부족회의인 `지르가(jirga)'와 같은 형태였으나 세력이 확장된 이후에는 협의절차 없이 오마르가 전적으로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오마르는 과거와 달리 중대결정을 앞두고서도 다른 지역을 방문하지 않았고 집권기에 수도 카불을 갔던 것도 2차례에 불과했다. ◇ 정권 붕괴 뒤 지휘체계 = 미군의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 오마르는 파키스탄의 퀘타나 발루치스탄주(州)에 은신한 상태에서 지하드(성전)을 막후에서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행동반경이 자유롭지 못한 그는 효율적인 지휘를 위해 지역별로 작전권을 부여받은 사령관을 임명, 미군 및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과의 전쟁을 독려하고 있다. 지난 5월 외다리로 탈레반의 야전 사령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물라 다둘라가 남부 헬만드주에서 미군과의 교전중 총상을 입고 사망하자 그는 "성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점령군에 대한 전사들의 공격은 계속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 지도부 회의를 직접 주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미국이 약속했던 경제개발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다 대 테러전의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면서 과거 탈레반과 일정한 거대를 뒀던 군벌이나 양귀비 재배 지주들도 속속 탈레반에 편입되거나 동조세력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범 탈레반계는 무차별적 테러나 납치행각을 저지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지역이나 세력별로 충성심이나 이념, 성향 등에서 차이가 있다. 일부는 알-카에다 계열이다. 이렇게 복잡한 지휘체계와 분파 때문에 외국인 납치사건 등이 일어날 경우 실행 집단을 둘러사고 논란이 일기도 한다. 자신을 탈레반 대변인이라고 밝힌 카리 유수프 아마디가 20일 AFP와의 전화통화에서 독일이 아프간 주둔군을 철수시켜야 인질 2명을 풀어주겠다고 밝혔지만 전날에는 자베울라흐 무자히드라는 다른 대변인이 탈레반은 독일인 납치에 관해 아는 바 없다고 밝혀 독일 정부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그 대표적 사례다. 우리 정부가 납치세력이 진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무엇보다도 그들의 정체 파악을 서둘러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한국인을 납치했다고 처음 알린 이후 살해 경고까지 한 카리 유수프 아마디가 언젠가부터 꾸준히 탈레반의 입 노릇을 해왔고, 특히 지난 3월 납치됐다 석방된 이탈리아 기자 대니얼 마스트로쟈코모의 사건에서도 대 언론 창구였다는 점에서 현재로서는 한국인들이 정통 탈레반 세력에 납치됐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wolf85@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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