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폭 공격한 40대 회사원.
평범한 이들 희생이 벵가지 ‘해방구’ 로 이끌어
시위 물꼬 튼 인권 변호사
자폭 공격한 40대 회사원
폭격 거부한 공군 조종사
시위 물꼬 튼 인권 변호사
자폭 공격한 40대 회사원
폭격 거부한 공군 조종사
지난달 15일 벵가지에서 시작된 리비아의 민주화 시위 보름째, ‘민주화 혁명’이 성공할지 단언하긴 아직 이르다. 하지만 카다피 정권을 사면초가의 궁지로 몰아넣은 건 분명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리비아인들의 희생과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 공영 라디오 <엔피아르>(NPR)는 지난달 28일 “리비아의 혁명이 예상밖 3명의 영웅을 낳았다”며, 평범한 한 40대 가장과 노총각 변호사, 공군 조종사를 조명했다.
거의 없는 머리숱, 큰 몸집에 안경을 쓴 메흐디 무함마드 제요(49)는 일터인 리비아 국영 석유회사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레바논 등지로 휴가를 다녀온 직후 조국에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다. 당뇨병을 앓던 그였지만 벵가지 시위 현장에 나가길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카다피에 충성하는 보안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10대 소년들의 주검을 공동묘지로 옮기는 일을 맡았다. 그를 지켜봤던 한 친척은 “제요가 무척 예민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2월20일 아침 그는 어깨에 가스통을 맨 채 조용히 집을 나섰다. 화약이 잔뜩 실린 자동차를 몰고 보안군이 지키던 군부대 앞에 도착했다. 그는 시위대를 향해 손으로 승리를 뜻하는 브이(V)자를 그려보였다. 그러고는 부대 정문을 향해 돌진했다. 보안군은 총알을 퍼부었다. 곧 정문에 다다른 그의 차가 폭발하면서, 부대 정문도 산산조각났다. 시위대는 군부대로 진입해 보안군을 내쫓았고, 이날 밤 리비아 제2 도시인 벵가지는 ‘해방’됐다.
<워싱턴 포스트>는 “제요의 얼굴은 이제 리비아 청년들이 이끈 저항의 상징이 됐다”고 전했다. 제요가 살던 아파트 입구엔 ‘순교자의 건물’이란 포스터가 붙었다. 제요의 값진 희생은 카다피에 대한 저항의 심장부가 된 벵가지의 해방을 결정짓는 ‘순교’였다. 그의 사무실 컴퓨터 앞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신에서 나고, 신으로 돌아간다.”
벵가지의 자유는 학살을 거부했던 압둘 살람 알압델리(49) 리비아 공군 대령이 없었다면 빼앗겼을지 모른다. 카다피는 그에게 반정부 세력 통제 아래 들어간 지역을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그가 거부하자, 전투기에 타고 있던 동료 조종사가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눴다. 그는 벵가지 상공에서 조종석 버튼을 눌러 비상탈출했고, 비행기를 추락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엔피아르>에 “내 나라 사람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릴 순 없었다”고 한 아들의 말을 전했다. 그는 탈출하면서 오른쪽 다리를 다쳐, 벵가지 시내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가디언>은 한 자원봉사자의 입을 빌어 “그는 사악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고, 이제 리비아 해방의 영웅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페티 타르벨(39) 변호사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96년 카다피가 벵가지 아부 살림 교도소에서 1200명을 학살한 사건의 변호사였다. 그의 형을 포함한 친인척 3명도 희생자 명단에 있었다. 그는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물러나자, 벵가지에서 민주화 시위를 계획했다. 하지만 계획을 눈치 챈 보안군은 그를 체포했다. 교도소 희생자 가족들은 2월15일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보안군은 바로 다음날 그를 석방했지만, 타르벨이 뿌린 혁명의 불씨는 리비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는 지금 벵가지의 2·17 혁명지도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시위 물꼬 튼 인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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