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과 ‘조건·시기’ 줄다리기
“나는 권좌에서 물러날 수 있다… 위엄과 위신을 유지하는 조건이라면 심지어 몇 시간 안에라도 가능하다.”
31년간 예멘을 통치해온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은 26일 아랍 위성방송 <알아라비야>에 이렇게 말했다. 조건만 맞으면 당장이라도 물러날 수 있다는 그의 발언은 반정부 시위 초기 ‘부자 세습 포기’ 약속에 이은 ‘2013년 임기 종료 이후 대선 불출마’, ‘2011년 연말까지 직무 수행’이란 단계적 양보안의 가장 최신판이다.
살레를 따르는 부통령과 정치고문이 이날 예멘 주재 미국 대사의 중재 아래 민주화 시위대 편에 선 군 지도자, 부족 지도자들과 마주앉아 살레를 위한 ‘출구 전략’을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고 <에이피>(AP) 통신이 보도했다. 회담 뒤 아흐메드 수피 대통령 대변인은 “야권은 대통령의 즉각 퇴진, 그와 그 가족들의 모든 공직 취임 금지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반면에 명예로운 퇴진을 원하는 살레는 <알아라비야> 방송 인터뷰에서 현 집권당 총재를 계속 맡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살레 쪽과 야권이 살레의 퇴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조건과 시기를 놓고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야권 연합 대표인 야신 노만은 “양쪽에 여전히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살레가 자신의 부족을 비롯한 군 장성, 국회의원, 장관, 대사 등이 줄줄이 이탈하면서, 퇴진에 앞선 요구 수위를 조금씩 낮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잇따른 협상 불발에도 살레가 곧 퇴진할 것이란 기대감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살레와 가까운 아부바크르 키르비 외무장관은 이날 <로이터> 통신에 “권력 이양의 시간표는 협상이 가능하다”며 “협상 타결이 오늘이라도 나오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살레도 계속 출구를 열어놓고 있다. 그는 지난 24일 한때 쿠데타 동지였다가 최근 등을 돌린 알리모흐센 아흐마르 장군과도 협상테이블을 마주했다. 다음날 지지자들 앞에서 한 연설에선 권력을 물려받는 주체가 “안전한 권력”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물러날 준비가 됐다”고 분명히 밝혔다.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