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7월28일 리히터 지진계 진도 7.8의 강진으로 폐허가 된 탕산 시가지.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하게 무너진 건물들이 당시의 참상을 보여준다. 사진 제공/중국신문사
76년 40만명 사상…언론 생존자 증언 잇단 보도
지난해 ‘국가 기밀’ 해제…다시 보도통제 움직임
지난해 ‘국가 기밀’ 해제…다시 보도통제 움직임
30년 전인 1976년 7월28일 새벽 3시42분, 중국 허베이성 탕산 일대를 리히터 규모 7.8의 강진이 습격했다. 베이징에서 자동차로 2시간 남짓 거리인 이 광산·공업도시는 한순간에 폐허로 변했다. 인구 70만의 작은 도시에서 24만2769명이 사망하고 16만4851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통계만 보더라도 당시의 참극을 짐작할 수 있다.
대지진 30돌인 올해 중국 당국은 대대적으로 탕산 대지진을 기리는 행사를 준비해왔다. 26일엔 탕산시에서 ‘탕산 지진 극복 30돌 전국 사진전’을 열어,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당시 현장 사진을 대거 공개했다. 탕산시에선 또 이날 홍콩의 주자훙 감독이 탕산 대지진을 소재로 만든 영화 <단원인장구>가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28일엔 이 도시에서 ‘탕산 지진 극복 기념관’이 문을 연다.
중국 당국의 대대적인 ‘탕산 대지진 극복’ 기념 활동에 발맞춰 <신화통신> <인민일보> 등 중국의 관영 언론들은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잇따라 전했다. <신경보> <남방주말> 등도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실었다. 탕산 대지진의 실체에 대해서는 중국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상보>는 27일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탕산시 제1의원 건물 폐허에 묻혔던 왕쯔란 등 두 명의 20대 여성은 8일 만에 구출됐고, 루구이란은 13일 만에, 천수하이 등 5명의 자오거좡 탄광 광부들은 지진 발생 15일 만인 8월11일에 구출됐다. 이들은 모두 서로 껴안아 체온을 유지했고 자기 소변과 진흙을 먹으면서 버텨냈다.
10만명의 인민해방군은 맨손에 삽과 곡괭이 등 빈약한 장비만 가지고 폐허 속에서 1만6400여명을 구해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탕산간수소(교도소)의 죄수들까지도 구조작업에 참여해, 맨손으로 112명을 구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만여명의 광부들이 작업을 하고 있던 탕산 카이롼 탄광에선 질서 있는 철수로 17명이 사망하는 데 그쳤다. 24만여명의 주검이 발생해 사나흘 지난 뒤엔 도시가 썩는 내로 뒤덮여 전염병 공포가 확산됐으나 인민해방군과 경찰은 주검을 신속하게 난후공원 지역에 집단 매장하거나 화장해, 전염병 발생률은 되레 평년보다 낮았다고 한다. <남방주말> 최근호를 보면 당시 탕산시 무장부 부장이던 천런취안은 주검 매장을 맡았는데, 사흘 만에 찾아낸 자기 아내의 주검조차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런 기록들은 탕산 지진을 극복한 보통사람들의 영웅담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지도부는 적지 않은 비판을 받고 있다. 탕산 대지진이 벌어졌을 때 야오원위안 등 이른바 ‘4인방’은 국내외 언론에 정확한 피해 상황을 공개하지 않아, 신속한 구조작업에 차질을 빚었다. 지난해 7월 <중국신문주간>은 탕산 지진국이 대규모 지진을 예고했음에도 당국이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아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탕산 대지진의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건 중국 당국이 자연재해 피해상황을 국가기밀로 분류해 보도를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12일에야 중국 국가보밀국과 민정부는 “중국 내에서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수가 더 이상 국가 기밀이 아니다”라고 선포했다. 올해 탕산 대지진에 대한 보도가 비교적 활발한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최근 다시 자연재해·사건사고·시위 등 ‘사회 긴급상황’에 대한 보도를 통제하기 위한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에서 ‘탕산의 교훈’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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