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총통으로 당선된 마잉주(馬英九) 국민당 후보는 귀공자풍의 준수한 외모가 돋보이는 대만 정가의 엘리트다.
유능, 청렴, 외모 등 `대중 정치인의 3박자'를 완벽하게 갖췄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50년 홍콩에서 학도군 출신의 공직자였던 부친과 중앙은행 외환국장이었던 모친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마잉주는 국민당에게 8년만의 정권교체를 안겨준 구세주라고 할 수 있다.
대만 최고 명문인 젠궈(建國)고교와 대만대 법학과을 졸업한 그는 1974년 국민당의 중산장학금을 받고 미국에 유학을 떠나 뉴욕대학에서 석사학위, 하버드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땄다.
1981년 대만으로 돌아오자마자 총통부 제1국 부국장직을 맡아 탁월한 영어 구사력으로 장징궈(蔣經國) 당시 총통의 영어통역과 비서로 활동하며 정식으로 대만 정계에 입문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1984년 일약 국민당 부비서장으로 입성한 그는 대륙위원회와 국가통일위원회 주요 간부를 거쳐 1993년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 정부에서 43세의 나이로 법무부장에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개혁성향의 법무부장으로 행정원에 입성한 그는 금권과 폭력으로 얼룩진 대만 정계를 대대적으로 사정하기 위해 폭력 조직과의 전쟁을 치르다 국민당내 본토세력과 헤이진(黑金.검은 돈) 비호 의원들의 협공으로 중도 하차했다.
하지만 법무장관 시절 부패척결에 앞장서 칼을 빼든 것이 지금의 마잉주 이미지를 만들었다.
'청렴결백'하고 '소신, 강단있는' 정치 지도자로 여론의 주목을 받은 그는 국립정치대학 법학교수로 돌아가 학계에 머물렀다. 181㎝의 훤칠한 키에 '꽃미남' 외모에 끌린 수백명의 여학생들이 수업에 참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8년 정치계로 돌아와 타이베이시장 선거에 출마한 그는 연임을 노리던 당시 천수이볜 시장을 5% 차로 누르며 대만 정국에 돌풍을 몰고왔다. 온화한 언행으로 '샤오마거(小馬哥)'라는 애칭을 얻은 그는 압도적 인기도를 바탕으로 2002년엔 64.1%의 표를 얻으며 시장 연임에 성공했다. 서울시와 자매 결연을 맺은 타이베이시 시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 버스 전용차선 도입 등을 벤치마킹, 타이베이시에 적용하기도 했다. 2005년 7월 롄 명예주석을 이어 국민당 주석으로 선출된 그는 곧바로 치러진 지방선거의 대승을 이끌며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 총통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 사건이 잇따르며 천수이볜 탄핵 정국이 이어질 당시 불분명한 그의 태도는 결단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국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선 타이베이시장 재임 시절 판공비 성격의 특별비를 유용한 혐의로 기소돼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겪었으나 잇따른 무죄 판결로 곤경을 벗어났다. 약소국 대만을 이끌 총통감으로는 다소 우유부단하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대중적 인기도를 바탕으로 향후 대만의 정국 주도권을 쥐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타이베이=연합뉴스)
'청렴결백'하고 '소신, 강단있는' 정치 지도자로 여론의 주목을 받은 그는 국립정치대학 법학교수로 돌아가 학계에 머물렀다. 181㎝의 훤칠한 키에 '꽃미남' 외모에 끌린 수백명의 여학생들이 수업에 참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8년 정치계로 돌아와 타이베이시장 선거에 출마한 그는 연임을 노리던 당시 천수이볜 시장을 5% 차로 누르며 대만 정국에 돌풍을 몰고왔다. 온화한 언행으로 '샤오마거(小馬哥)'라는 애칭을 얻은 그는 압도적 인기도를 바탕으로 2002년엔 64.1%의 표를 얻으며 시장 연임에 성공했다. 서울시와 자매 결연을 맺은 타이베이시 시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 버스 전용차선 도입 등을 벤치마킹, 타이베이시에 적용하기도 했다. 2005년 7월 롄 명예주석을 이어 국민당 주석으로 선출된 그는 곧바로 치러진 지방선거의 대승을 이끌며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 총통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 사건이 잇따르며 천수이볜 탄핵 정국이 이어질 당시 불분명한 그의 태도는 결단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국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선 타이베이시장 재임 시절 판공비 성격의 특별비를 유용한 혐의로 기소돼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겪었으나 잇따른 무죄 판결로 곤경을 벗어났다. 약소국 대만을 이끌 총통감으로는 다소 우유부단하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대중적 인기도를 바탕으로 향후 대만의 정국 주도권을 쥐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타이베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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