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유강문 특파원
특파원리포트
2008년 5월19일 오후 2시28분 ‘거대한 가족’이 탄생했다. 뱃고동처럼 길게 이어지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태어난 이들은 슬프게도 부모의 얼굴을 모른다. 이들의 부모는 쓰촨성을 휩쓴 대지진에 모두 목숨을 잃었다. 13억의 자식들은 이날 베이징 톈안먼과 상하이의 와이탄, 청두의 톈푸광장에 모여 3분 간의 묵념으로 부모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날 청두의 티베트인 거리에도 가족의 탄생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티베트불교 서적과 그림, 티베트인들의 전통의상을 파는 가게가 몰려 있는 이곳의 티베트인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두달여 전 라싸에서 분리독립 시위가 벌어졌을 때 날카로운 긴장이 교차하던 이곳에서도 13억의 형제자매는 무사히 출생신고를 마쳤다.
중국 곳곳에선 요즘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구호가 메아리친다. 지진의 참극이 빚어진 현장에 걸린 현수막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낱말이 ‘가족’ ‘형제자매’ ‘동포’ 들이다. 복구를 독려하는 구호도 ‘새로운 가정을 건설하자’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은 재난 현장에서 생존자 구조와 피해 복구를 지휘하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부모 같은 관리’라는 호칭까지 붙였다.
재난 현장에서 난민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들도 피해자들의 죽음과 삶에 울고 웃는다. 올림픽 성화 봉송을 둘러싸고 충돌이 빚어졌을 때 극단적 민족주의를 표출했던 이른바 ‘바링허우’(80년대 출생한 이들)에 속하는 이들이 난민들에게 쏟는 정성은 인류의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뛰어넘는다. 스팡에서 만난 한 자원봉사자는 “집을 잃은 노인들은 내 부모이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내 동생”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이제 ‘민족’을 넘어 ‘가족’으로 통일돼가고 있다. 홍콩 중문대가 19∼21일 홍콩 시민 1110명을 대상으로 정체성을 물었더니,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긴다는 응답자가 55.9%로 나타났다. 이런 비율은 3월엔 35.9%, 4월엔 37.4%에 불과했다. 지진 현장의 참혹함과 구조대원들의 헌신적 활동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국민들 사이에 전례없는 유대감이 형성된 것이다.
티베트 사태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당시 중국 정부는 시위대를 ‘폭도’ ‘범죄자’로 낙인찍었다. 티베트는 곧바로 봉쇄됐고, 진압·경비 병력 이외의 출입이 한동안 금지됐다. 중국의 유혈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는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는 점을 망각하거나 무시한 반중국 책동으로 단두대에 올랐다.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유대감과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라는 선언 사이엔 거대한 균열이 존재한다. 재난 현장에서 매몰자 구조에 혼신의 힘을 쏟은 인민해방군은 라싸에선 시위대에 총을 겨눴다. 그야말로 영웅적으로 도로를 뚫고, 산길을 지나 재난 현장으로 돌격한 이들은 라싸에선 물과 빵이 아니라 곤봉 세례를 줬다. 중국은 이번 대지진 참사를 통해 ‘위대한 가족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이제 가족주의 차원으로 응집력을 더하고 있다. 한 외교관은 티베트 사태로 흔들리던 베이징 올림픽이 이들 13억 가족의 거대한 추도식으로 꾸며질 것이라고 말했다. 티베트도 평화롭게 그 가족의 일원이 될 것인가? 지진에 매몰된 것은 쓰촨성의 집과 학교만이 아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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