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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국

“난 억눌려도 물위로 떠오르는 표주박”

등록 2009-09-22 21:52수정 2009-09-23 06:58

기업가 싱칭윈(72)
기업가 싱칭윈(72)
[중국 건국 60돌 용의 승천] ①어느 중국인의 60년
“중국 인민이 떨치고 일어섰다(中國人民站起來了).”

1949년 10월1일 베이징 천안문(톈안먼) 위에서 마오쩌둥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이후 60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품은 이 나라는 거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마오쩌둥이 그렸고 덩샤오핑이 띄웠던 ‘용’은 이제, 전세계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중국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답을 특파원 현지 르포와 중국에 던지는 6개의 질문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을 통해 세 차례로 나누어 살펴본다.

11살 혁명과 만나…31살 ‘우파’ 몰려 고초…50살 개혁개방에 ‘올인’

“개혁개방과 함께 나는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밖으로 날아오르듯 솟아올랐다.”

이달 초 홍콩이 건너다보이는 중국 광둥성 선전의 아파트에서 만난 기업가 싱칭윈(72)은 30년 전 중국이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섰을 때 느낀 환희를 이렇게 표현했다.

1988년 3월, 싱칭윈은 대형방직공장 부공장장이라는 지위를 버리고, 빈손으로 머나먼 선전에 왔다. 그의 나이 50살이었다. 가족들에게도, 회사에도 알리지 않았지만, 마음속엔 “국가에 소속된 공장이 아닌 세상에 나가 내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자”는 굳은 결심이 있었다.2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선전에서 대형 운수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7명의 자녀들도 모두 각자의 회사와 공장을 소유하는 거대한 부를 일궜다.


싱칭윈은 지난 60년 동안 중국인들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왔는지를 보여주는 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1938년 중국 동북의 지린성 타오난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때 중국 혁명이 일어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 그는 “(혁명이 일어난) 1949년부터 1956년까지는 황금시대였다”며 “밤에는 문을 잠그지 않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지 않는 시절, 모두들 마음이 선량하고 서로를 믿었으며 애국적 열정으로 가득찼던 시절”로 기억한다.

“백성 굶주려” 말했다 노동교화


기업가 싱칭윈(72)
기업가 싱칭윈(72)
1950년대 말부터 반우파 투쟁과 숙청의 정치적 먹구름이 중국을 뒤덮었다. 1959년 싱칭윈은 우파분자로 몰렸다. “정풍운동과 백화제방 시기에 ‘혁명 이후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말했다가 공산당 반대파로 몰렸다. 3년 동안 농촌으로 보내져 노동교화를 당했다.” 노동교화를 마치고 공장으로 돌아온 그는 일에만 매달렸다. “너희들이 권력으로 나를 억눌러도 나는 내 일에서 최고가 되겠다. 아무리 억눌러도 다시 물위로 떠오르는 표주박처럼 내 노력으로 계속 떠오르겠다는 ‘표주박 정신’으로 분투했다.”

그에게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시기는 악몽처럼 끔찍했고 농담처럼 우스웠다. “그 시기에 중국인들은 정말 가난했고, 잘못된 정책으로 대기근도 겪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들이 조상들의 사당까지 옛 유적과 유물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반혁명으로 몰릴까봐 누구도 감히 반대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

그는 특히 그 시기의 기억이 중국인들의 심성을 뒤틀리게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1957년부터 1978년까지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진심을 말한 사람들은 다 고초를 겪었다. 서로가 서로를 특무로 고발했다. 이후 누구도 진심을 말하지 않고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됐다.”

개혁개방 때 빈손으로 선전행

1978년 역사의 수레바퀴가 방향을 바꿨다. 덩샤오핑이 실권을 잡고 개혁개방 노선을 선언했을 때, 싱칭윈은 70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타오난 모직공장의 부공장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국가가 알아서 분배했지만,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그는 부공장장으로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북경과 상하이 등 대도시의 상점들을 찾아다녔다. “이때 곳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봤고, 특히 광둥성에서 선전 경제특구가 개발되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기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1988년 출장을 핑계로 선전에 온 그는 일본계 식품회사에 일자리를 구해 2개월반 동안 일을 해본 뒤 고향의 방직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한 부인은 석달 뒤 막내아들을 데리고 선전으로 왔다. 싱칭윈은 식품회사의 관리직원으로, 부인과 아들은 공장 노동자로 일을 시작했다. “국영기업 부공장장으로 일하면서 월 104위안을 받았지만, 선전에서는 500위안을 받았다. 고향에서 월 50위안을 벌던 아내는 선전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해 월 200위안을 벌었다.”

20년만에 대형 운수회사 일궈

그의 기억 속에 선전의 첫인상은 “원시적”이었다. 산과 붉은 흙더미, 흙탕물, 포장도 전혀되지 않은 채 흙투성이인 도로들, 그 사이로 어쩌다 낮은 건물들이 한두채씩 서 있었다. 그러나, 발전 속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올랐다. 익숙한 곳도 1~2개월 만에 가보면 새 길과 새 건물이 너무 많이 생겨 알아볼 수가 없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엄청나게 많았다.”

5년 만인 1993년, 그때까지 온 가족들이 번 돈을 모두 모아 트럭을 한대 사 물류운송 일을 시작했다. 돈이 모일 때마다 차를 한대씩 늘렸고 1998년에 물류회사를 세웠다. 선전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사업은 계속 번창했다. 싱칭윈은 “우리 가족 모두 선전에 올 때는 빈손이었다. 정부 고관의 ‘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맨손으로 시작해 가족 모두의 땀방울로 집안을 일으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가 마음 속 깊이 존경하는 인물은 덩샤오핑이다. “덩샤오핑이 있었기 때문에 개혁개방이 실현될 수 있었다. 당시 당 고위층에서 개혁개방에 대한 반대가 강력했지만, 덩샤오핑은 ‘혁명의 목적은 백성들을 굶주리고 가난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라며 단호하게 개혁을 밀고 나갔다.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내가 누리는 행복한 삶은 없었을 것이다.”

요즘 아들에게 경영을 맡긴 그가 특히 관심을 쏟는 것은 중국 전통과 고전이다. “현재 중국 사회의 여러 도덕적 문제는 공맹의 도를 모두 파괴한 문화대혁명이 남긴 큰 후유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농촌에 하방되었을 때 지주의 손자가 몰래 건네줘 간직해온 고전을 읽으며, 그는 중국의 “도덕 회복”을 꿈꾼다.

선전/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중국 건국 60주년 주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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