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르족인 일함 토티 교수가 지난 20일 베이징 자택 회견에서 베이징 당국의 위구르족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고 있다.
중국 정부, 선동배후로 지목
신변위협에 가족 ‘이산생활’
신변위협에 가족 ‘이산생활’
우루무치 유혈사태 1년…위구르 학자 일함 토티 인터뷰
지난해 7월5일 중국 중앙민족대학의 위구르족 교수 일함 토티(41)는 한밤중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중심도시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들의 대규모 반한족 시위가 벌어졌고 당국이 이 사태를 선동한 배후로 일함이 운영하던 사이트(uighurbiz.cn)를 지목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날 자정 무렵 그의 사이트는 폐쇄됐고, 일함 교수는 그후 2달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의 구금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쓰러졌다. 올해도 그는 초청받은 해외 학술대회 참석을 모두 금지당하고 있다. 한밤중에도 수상한 전화가 걸려온다. 그는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아내와 두 아이를 신장 서부 아크투의 고향집에 보내 ‘이산가족’ 생활을 하고 있다.
우루무치 유혈사태 1주년을 앞둔 지난 20일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근처 그의 아파트에서 일함 교수를 만났다. 1991년부터 중앙민족대학에서 법과 경제, 중앙아시아 정치 등을 강의해온 그는 “가장 중국인 같지 않은 중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위구르족 동포들이 겪는 차별을 고발해온 대표적인 위구르족 지식인이다. 그는 위구르족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2006년 위구르비즈 사이트를 열어 위구르족들의 현실을 알려왔다. 1990년대 중반 한국 중앙대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 지금도 한국어와 한국 생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무더위 속에서 4시간 가까이 그는 자신의 땅에서 권리를 빼앗긴 소수자로 전락하고 있는 위구르족들의 처지에 대해 지치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는 한족중심주의로 인해 신장에서 법으로 보장된 소수민족 자치가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중국 법에 신장은 위구르족들의 자치구이고, 위구르인의 종교·언어의 자유가 보장돼 있다. 위구르어가 신장의 공용어로 돼 있다. 또 신장에서 자원을 개발하면 우선적으로 현지 주민을 채용해 기술인력과 관리자로 육성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런 모든 조항들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올들어 중국 정부가 신장 민족문제를 해결을 강조하며 대규모 투자 계획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그는 “경제적 해법만으로는 위구르족과 한족의 빈부격차만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신장의 주요 산업은 천연자원 개발과 국경무역이다. 천연자원 개발에서 일자리는 위구르족들에게 돌아가기 않고 유전개발 수익이 위구르족들에게 돌아가는 비율은 5%도 안된다. 국경무역에서도 한족들은 관리들과의 각종 관시를 이용해 각종 허가증을 받아 쉽게 큰 돈을 벌지만 위구르족들은 한족권력층과 연결될 수가 없다. 위구르족들은 정부와 관련되지 않는 작은 가게를 꾸리며 생계를 이어갈 뿐이다.” 그는 “중국의 30여개 성·자치구 가운데 신장 국내총생산(GDP)는 이미 중상 수준이지만, 중요한 것은 민족간 권리의 분배 문제”라고 강조했다.
1949년 인민해방군이 신장에 진주했을 당시 한족 인구는 군대를 모두 합해 4.6%, 위구르족은 79.87%였다. 이후 한족 인구가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한족 인구 비율이 이미 40%를 넘었다. 위구르족의 땅에서 위구르족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문제는 심각하다. 그는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들의 취업률이 낮은 이유가 중국어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신장 자체에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있어 내지에서 노동력을 수입하고 있는데도 왜 위구르인들은 이곳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전국을 해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위구르족이 모두 중국어를 완벽하게 해야한다는 것은 우리의 언어를 잃고 종교와 문화도 희미해지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중국어를 잘하는 위구르족 대학생들도 차별 때문에 취직을 하지 못한다. 베이징의 명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내 사촌 동생들도 졸업 뒤 2년 넘게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많은 일자리마다 한족을 찾는다는 제한이 붙어있다.”
그에게 ‘위구르족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자치인지 독립인지’ 물었다. “대다수의 위구르인들은 자치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에 보장된 민족자치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에서 특히 지난해 유혈사태 이후 독립을 원하는 위구르족들이 늘어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진정한 자치가 실현될 수 있는지 회의하게 됐기 때문이다. 위구르족의 대체적인 태도는 우리 민족이 중국에서 잘 생활할 수 있다면 국가를 인정할 것이고,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혈사태가 나기 전 그에게는 큰 꿈이 있었다. “인터넷에 위구르족을 위한 훌륭한 대학을 세워 전세계의 위구르족 학자들이 강의를 하도록 하고, 온라인 위구르 도서관을 세워 위구르어와 위구르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고, 위구르족을 연구하는 잡지를 창간해 위구르어와 영어, 중국어로 인터넷을 통해 발행하고 싶었다.” 1978년 신장의 대학·전문대학 학생중 소수민족 비율은 77.1%에 달했으나 2008년 33.6%로 줄어든 교육 차별의 현실을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지금 정부의 통제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지난해 7월5일 위구르족들의 반한족 시위로 197명이 사망했고 사망자 대부분이 한족으로 알려진 데 대해, 그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믿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정부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유혈사태 1주년을 맞아 신장에서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신장의 문제는 지난해 유혈사태에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며, 화산이 언제 폭발할지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위구르족과 한족의 공존을 꿈꾼다 “위구르족이 신장에 온 800만 한족을 몰아내는 일도 없을 것이며 한족이 1000만 위구르족을 모두 말살시킬 수도 없다. 중국의 민족자치법에 규정돼 있는 대로 위구르언어가 공식언어로 사용되고, 법률, 교육권이 보장되며, 경제개발의 혜택이 현지 위구르인들에게도 돌아가도록 보장되는 진정한 자치가 실현되면 신장의 안정이 올 수 있다.” 그는 “가족들이 나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도 역사가 나를 선택한 것 같다”며 “외국에 나갈 기회가 많았지만, 중국에서 위구르족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한족과 위구르족의 다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베이징/글·사진 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중국 신장 위치도
유혈사태가 나기 전 그에게는 큰 꿈이 있었다. “인터넷에 위구르족을 위한 훌륭한 대학을 세워 전세계의 위구르족 학자들이 강의를 하도록 하고, 온라인 위구르 도서관을 세워 위구르어와 위구르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고, 위구르족을 연구하는 잡지를 창간해 위구르어와 영어, 중국어로 인터넷을 통해 발행하고 싶었다.” 1978년 신장의 대학·전문대학 학생중 소수민족 비율은 77.1%에 달했으나 2008년 33.6%로 줄어든 교육 차별의 현실을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지금 정부의 통제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지난해 7월5일 위구르족들의 반한족 시위로 197명이 사망했고 사망자 대부분이 한족으로 알려진 데 대해, 그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믿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정부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유혈사태 1주년을 맞아 신장에서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신장의 문제는 지난해 유혈사태에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며, 화산이 언제 폭발할지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위구르족과 한족의 공존을 꿈꾼다 “위구르족이 신장에 온 800만 한족을 몰아내는 일도 없을 것이며 한족이 1000만 위구르족을 모두 말살시킬 수도 없다. 중국의 민족자치법에 규정돼 있는 대로 위구르언어가 공식언어로 사용되고, 법률, 교육권이 보장되며, 경제개발의 혜택이 현지 위구르인들에게도 돌아가도록 보장되는 진정한 자치가 실현되면 신장의 안정이 올 수 있다.” 그는 “가족들이 나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도 역사가 나를 선택한 것 같다”며 “외국에 나갈 기회가 많았지만, 중국에서 위구르족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한족과 위구르족의 다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베이징/글·사진 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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