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청 사건’ 미-중 파장은
천안문 사태 팡리즈 사건 닮아
민주화·패권 놓고 갈등 커져
천안문 사태 팡리즈 사건 닮아
민주화·패권 놓고 갈등 커져
2012년 시각장애인 인권변호사 천광청의 사건은 여러모로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발생했던 팡리즈 사건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두 반체제 지식인의 ‘탈출’은 미-중 관계의 전환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팡리즈 사건이 양국의 알력과 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천광청 사건은 양국 관계를 알력과 경쟁 쪽으로 본격 이동하는 시기의 상징적 사건이 되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20여년에 걸친 양국관계의 심화 속에 그 파장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중국의 사하로프’로 불리던 인권운동가이자 물리학자 팡리즈는 1989년 6월 중국 당국의 천안문 시위 진압 와중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는 미국 대사관에서 1년 이상이나 머물다가,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두 사건은 몇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 양국 관계를 규정하던 국제정세의 급변이다. 팡리즈가 미 대사관에 머물던 때는 천안문 사건 외에도 베를린 장벽 붕괴 등 사회주의권 몰락이 시작된 때다.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극비 방중 이후 양국 관계를 추동하던 ‘소련 견제’라는 전략적 공통분모가 희석된 것이다. 중국은 천안문 시위 진압 한 달 전인 5월 고르바쵸프를 초청해, 발 빠르게 중-소 관계 정상화에 들어가면서 미국을 당혹케 했다
이번 천광청 사건은 국제체제가 미-중의 ‘G2 체제’로 굳어지는 가운데 일어났다. 미국은 지난해 ‘아시아태평양으로의 귀환’을 선언하며, 동아시아에서 중국 견제와 포위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중국과 동남아 국가 사이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직접 개입하고, 오스트레일리아나 필리핀, 베트남과 군사협력 관계를 재정립했다. 중국이 독점하던 미얀마에게도 외교 손길을 내밀었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때에는 항모를 서해로 파견했다. 중국도 지난달 러시아를 서해로 불러, 최초의 양국 공식 해상훈련을 가졌다. 러시아가 서해에서 공식적으로 군사력을 전개한 것은 러-일 전쟁 이후 100여년만이다.
둘째, 중국 내의 권력투쟁이다. 팡리즈 사건 직전 정치 민주화 문제에서 온건파이던 후야오방 당 총서기 실각과 사망 등 권력투쟁이 일었다. 자오쯔양 후임 총서기도 천안문 사태 와중에 실각하고, 리펑 총리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 강경파가 득세했다. 천광청 사건도 보시라이 충칭 당서기의 실각 등 천안문 사건 이후 최대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일어났다.
셋째, 중국 내의 민주화 요구 분출이다. 팡리즈 사건 때의 천안문 민주화 시위 때 정도는 아니나, 최근 중국에서는 공산당 통치에 도전하는 풀뿌리 차원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지난 2월 전횡하던 지방 정부 간부들을 몰아내고 주민들의 첫 민주적 선거를 치른 광둥성 우칸촌 사건이 대표적이다. 또 지난해부터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에 대한 모금 운동 등 개별 인권운동가들에 대한 지원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천광청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방식으로 사건을 미봉한 다음날인 3일 베이징에서 열린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개막사를 통해 “모든 정부는 시민들의 존엄 요구와 법의 통치에 답해야 하고 어떤 나라도 이런 권리를 부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양국은 “우리의 서로 다른 국가적 조건을 감안하면 모든 문제에서 눈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나, 상호이해를 증진시켜 그 차이를 적절히 관리하고 그 차이가 미-중 관계의 더 큰 이익을 잠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전략적 동반자’라는 양국의 관계가 갈수록 ‘전략적 경쟁자’로 바뀌는 상황에서, 해결이 불투명한 천광청 사건은 그 촉매가 되고 있다. 이번 사건의 결말은 양국 관계의 방향을 예고할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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