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커창·왕치산 ‘개혁’ 토론 벌여
재평가·추모 허용 가능성 낮아
재평가·추모 허용 가능성 낮아
1989년 4월 베이징의 한 호텔, 지식인 400여명이 나흘간 중국의 미래를 놓고 치열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벌였다. 현재 중국 최고 지도부의 일원이 된 리커창 총리, 리위안차오 국가부주석, 왕치산·위정성 상무위원 등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3일 당시 <신화통신> 간부 등을 인터뷰해 보도했다.
그 직후 벌어진 천안문 시위가 인민해방군에 진압된 뒤 개혁적 지식인들의 운명도 갈렸다. 리커창 등은 공산당 조직에 적응해 권력을 향해 나아갔지만, 많은 이들은 시위에 참가했다가 주모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거나 국외로 망명했다.
베이징대 학생 시절 리커창은 토론 모임에서 자유선거와 서구 철학 등을 밤새 토론하던 학생이었다고, 그의 대학 동기인 왕쥔타오가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왕은 천안문 시위로 투옥됐다가 미국에 망명했다. 왕치산 상무위원도 1980년대 초 계획경제를 극복할 경제개혁을 주장해 ‘4명의 개혁군자’로 불렸다. 천안문 시위 당시 지방관리였던 시진핑은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 시중쉰 전 부총리는 개혁파로서 계엄령에 반대했다.
그러나 시진핑-리커창 체제 들어 첫 천안문 시위 기념일은 전보다 더 삼엄한 분위기 속에 지나갔다. ‘반혁명 동란’으로 규정된 사건을 재평가하거나 희생자 추모를 허용하는 등의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시진핑 지도부가 좀더 개혁적인 모습을 보여주리라 기대한 이들은 실망을 감추지 않는다. 천안문 시위 당시 시위대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가 실각한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비서였던 바오퉁은 2일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시진핑 주석이 취임 뒤 헌정(입헌 민주정치)을 강조하는 데 감명받았으나 최근 그가 사상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보고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오쯔양의 또다른 비서인 우웨이는 “당 조직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들(1980년대 개혁적 분위기를 경험한 지도자들)에게 그 시대가 남긴 흔적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며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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