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퉁
베이징 시장때 리펑과 강경책 주도
장쩌민에 밀려 옥살이뒤 회고록 내
“시위진압은 권력투쟁 결과” 주장
‘권력자들 단죄없는 죽음’ 실망 번져
장쩌민에 밀려 옥살이뒤 회고록 내
“시위진압은 권력투쟁 결과” 주장
‘권력자들 단죄없는 죽음’ 실망 번져
1989년 중국 천안문(톈안먼) 민주화 시위 유혈 진압 주동자의 한명인 천시퉁(사진) 당시 베이징 시장이 숨졌다. 천안문의 비극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책임자들은 단죄받지 않는 데 대한 실망감이 번지고 있다.
“천시퉁 전 베이징 시장이 지난 2일 오전 9시45분 베이징에서 대장암으로 84살을 일기로 숨졌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 홍콩 언론들이 4일 보도했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 베이징 시장을 지낸 천은 1989년 천안문 시위 강경 진압의 핵심 인물중 한명으로 지목된다. 천안문 시위 당시 시위대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다 실각한 자오쯔양 전 총서기는 회고록에서 “시위 초기인 1989년 4월24일 당 지도부 회의에서 천시퉁 시장과 리펑 총리 등이 이를 ‘조직적인 반당, 반사회주의 운동으로 몰아갔다. 이들은 탄압 당일인 6월4일 중난하이 회의에도 참석해 학생운동 탄압을 주도했다”고 적었다.
시위 진압 뒤 천시퉁은 베이징 당서기와 중앙정치국원을 지내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당시 공산당의 주요 파벌인 베이징방의 핵심으로서, 상하이방을 이끌고 새 지도자가 된 장쩌민의 맞수로 떠올랐다. 1995년 천은 베이징 시장 시절 돈을 받고 건축 허가를 내주는 등 총 120억위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당적을 박탈당했고, 3년 뒤엔 16년 형을 확정받고 몰락했다. 천시퉁의 몰락은 장쩌민 당시 주석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결과로 여겨진다. 천시퉁의 몰락은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 천량위 상하이시 서기 낙마와 함께 공산당 최고위층 권력투쟁을 대표하는 숙청 사건으로 꼽힌다.
그는 16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2004년 신병 치료를 이유로 가석방된 뒤 샤오탕산의 고급 요양시설에서 지내다 베이징의 군병원에서 숨졌다. 천시퉁은 강경 진압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다. 2012년 <천시퉁의 직접 진술>이란 책을 펴내 “천안문 시위 진압은 지도부 안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돼 비극으로 나아가게 됐다. 나도 정쟁의 희생자이자 꼭두각시였다”고 주장했다.
희생자 유족들의 재평가·명예회복 요구를 당국이 묵살해온 지 24년, 그동안 시위 진압 당시 최고 실권자인 덩샤오핑을 비롯해 군부 강경파 양상쿤-양바이빙 형제 등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강경 진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리펑 전 총리는 아들이 산시성장으로 승승장구하는 등 여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베이징/성연철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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