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셔츠 차림 출두 수뢰·횡령 반박
가족·기자 일부 방청…외신은 불허
법정 문자중계…동영상 일부 공개
‘파벌갈등 조정’ 시진핑 정치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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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갈등 조정’ 시진핑 정치 시험대
‘충칭의 왕’ ‘태자당의 황태자’로 불리던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가 침울한 표정으로 피고인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한 지 17개월 만이다. 죄수복은 입지 않았지만, 흰색 와이셔츠 차림에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22일 오전 8시49분, 중국 산둥성 지난시 중급인민법원에서 시작된 ‘세기의 재판’에서 보시라이는 자신에게 적용된 뇌물수수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했다. 지도부 사이에 미리 판결과 형량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뒤 진행되는 중국의 정치 재판에선 이례적인 모습이다.
지난시 인민법원이 웨이보(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문자 중계한 이날 재판에서 보시라이는 시작 때부터 “정의롭고 공정한 재판을 원한다. 사안별로 설명하겠다”며 10시간여의 재판 내내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보시라이가 1996~2006년 다롄 시장·당서기, 랴오닝 성장, 상무부장으로 재직하며 탕샤오린 다롄국제발전공사 대표와 쉬밍 다롄스더그룹 회장에게 각각 100만위안과 2010만위안을 뇌물로 받는 등 총 2679만위안(49억원)을 챙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부패한 사기꾼인 탕 대표에게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 “내 아내와 아들에게 쉬 회장이 프랑스 니스의 빌라를 사주는 등 금전적 지원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며 혐의를 전면 반박했다. 그는 앞서 공산당 기율검사위원회의 조사에서 혐의를 인정한 데 관해서도 “부당한 심리적 압박과 회유 탓에 양심을 어기고 한 일”이라며 기존 진술을 뒤집었다. 보시라이는 부인 구카이라이가 검찰에 자신의 뇌물수수를 증언한 데 대해서도 “터무니없고 가소로운 일”이라고 일축했다. 구카이라이는 직접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고 서면 증언을 제출했다.
이틀 일정으로 예정된 이번 재판에서 보시라이가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나서면서, 예상보다 치열한 법정 공방이 전개될 가능성이 커졌다. 중국 혁명원로인 보이보의 아들로 태자당의 선두주자였고 좌파의 상징적 존재인 보시라이는 자신을 부패 정치인이 아닌 권력투쟁의 희생양으로 부각시키려는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순순히 죄를 인정해 감형받는 대신,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켜 법원, 나아가 중국 지도부를 압박하는 ‘정면돌파’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정상참작의 여지가 적어져 15년 정도로 예상되던 형량이 가중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반항’이 잘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는 이번 ‘정치적 재판’의 결과를 뒤집을 가능성은 낮다.
이번 재판이 시진핑 국가주석 체제의 정치적 시험대가 될 가능성도 커졌다. 시 주석이 보시라이 재판을 둘러싸고 더욱 첨예해진 중국 내 좌파와 우파의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그의 지도력이 공고해질 수도, 헐거워질 수도 있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21일 “중국 사법 당국이 보시라이에게 수뢰와 횡령, 권력 남용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혐의를 적용한 것은 중국 지도부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지도부는 한편으로는 보시라이의 범죄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보시라이를 지지하는 좌파층을 평정하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보시라이가 추진한 마오주의식 ‘붉은 좌파’ 정책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평했다. 시 주석은 대중노선을 강조하며 마오쩌둥식 통치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 <명보>는 “중국 좌·우파 모두 이번 재판을 단순한 형사 재판이 아닌 정치 재판으로 판단하고 있다. 보시라이의 형량이 과하면 좌파를, 형이 가벼우면 우파를 자극하게 될 것”이라며 “이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과 원만한 해결책을 찾는 게 시 주석의 과제”라고 분석했다. 이번 재판 결과가 시 주석이 취임 초기부터 강조해온 ‘부패와의 전쟁’의 추진력에 영향을 끼치리라는 전망도 있다.
중국 지도부는 보시라이의 발언과 일거수일투족이 지지자들을 자극할까봐 신경을 곤두세운 모습이다. ‘몰락한 보시라이가 권력자들을 뒤흔드는’ 상황이다. 법원 주변에 공안들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가운데, 보시라이의 가족 5명과 기자 19명 등 110명만 방청을 허가받았다. 하지만 이 외에 외신을 비롯한 다른 취재진의 방청은 모두 금지됐다. 대신 당국은 법원 관영 웨이보를 통해 문자로만 재판 상황을 중계했다. 당국이 선별해 편집한 사진 몇장과 동영상도 공개됐다.
이날 법정 밖에서는 일부 보시라이 지지자들이 “충칭시의 실험은 인민에게 이익을 줬다”는 구호가 적힌 푯말과 마오쩌둥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중국 인터넷은 이날 하루 종일 보시라이 재판에 대한 관심으로 뜨거웠으며, 200만명 이상의 누리꾼이 재판을 중계한 법원 웨이보를 팔로했다.
베이징/성연철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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