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사태 25주기 풍경
광장진입 관광객 신분증 검사
무장병력·사복경찰 가득 배치
홍콩선 15만명 참가 집회 열려
망명한 지도자들 영상 메시지
국제사회선 재평가 요구 거세
광장진입 관광객 신분증 검사
무장병력·사복경찰 가득 배치
홍콩선 15만명 참가 집회 열려
망명한 지도자들 영상 메시지
국제사회선 재평가 요구 거세
민주와 개혁, 반부패를 외치던 천안문(톈안먼)의 시위대가 인민해방군에 진압된 지 25년이 흐른 4일 오전 베이징의 무시디 전철역. 천안문 광장에서 서쪽으로 6㎞ 가량 떨어진 이곳은 1989년 6월3일 밤 11시께 계엄군의 첫 발포가 시작된 곳이다.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된 군의 탱크와 총격을 막으려던 시민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무시디 지하철역엔 출구마다 무장경찰 차량이 서너대씩 배치돼 만일의 사태를 철통봉쇄했다. 일부 출입구는 아예 폐쇄됐다. 해마다 이맘때면 당시 계엄군에 자녀를 잃은 ‘천안문 어머니회’의 창설자 딩즈린 등이 이곳에서 몰래 노재를 지냈지만 올해는 이마저 불가능했다. 딩은 가택연금 상태다.
천안문 광장을 비롯해 베이징 중심가 곳곳도 삼엄한 경계로 숨이 막힐 듯했다. 공안들은 광장으로 진입하는 관광객의 신분증을 일일이 검사했다. 쯔진청(자금성)으로 가려는 관광객들 역시 입구에서 약 500여m 떨어진 동쪽 검색대를 통과해야했다. 천안문 앞의 창안제에는 공안 차량이 줄을 지었다. 이따금 완전 무장을 한 병력들이 지프차를 타고 분주히 오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광장에는 사복 경찰로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까다로운 경계 탓인지 천안문 광장에는 평소보다 관광객이 적었다.
대륙의 강요된 침묵과는 달리 홍콩에서는 이날 저녁 15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천안문 25돌 집회를 열었다. 시민단체인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지련회)’가 빅토리아 공원에서 연 집회엔 천안문 시위의 학생 지도자였던 왕단과 우얼카이시, 왕쥔타오, 저우펑쒀 등이 보낸 영상 메시지가 상영됐다. 25년 전 맨몸으로 계엄군의 탱크를 막아선 베이징 시민을 촬영했던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도 참석했다.
대만 칭화대에서 중국사를 가르치고 있는 왕단은 최근 국제앰네스티,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과 한 인터뷰에서 “천안문 항쟁은 중국인들의 영혼에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던졌고, 이는 미래 세대에게도 영감을 줄 것이다. 그때의 투쟁에 한치의 후회도 없다”고 말했다. 당시 베이징대 1학년생으로 시위를 이끌었고 무력진압 뒤 당국의 수배자 1호가 됐던 그는 “정부가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했고, 이후 권력의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천안문 항쟁 당시 희생된 이들을 위해 투쟁을 이어갈 것이며, 이는 나의 존재 이유이자 의무다”라고 했다. 또다른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우얼카이시는 “지금 중국의 상황은 공산당이 즐겨쓰는 격언처럼 ‘새벽이 오기 직전의 가장 캄캄한 어둠의 순간’이다”라고 말했다. 위구르족 출신인 그 역시 현재 대만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천안문 시위에서 단식 투쟁을 주도했던 학생 지도자 저둬는 “중국의 민주주의는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아직 시민사회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아 (정치) 개혁에 대한 합의가 부족하고 반감도 있다”고 말했다. 왕단이나 우얼카이시와 달리 중국 본토에서 살고 있는 그는 “이런 상황에서 섣부른 대중운동은 자칫 통제되지 않는 극단의 상황이나 학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신중한 태도를 밝혔다.
국제사회와 홍콩 언론들은 일제히 천안문 사태의 진상 규명과 시위 재평가를 촉구했다. 나비 필레이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은 3일 “중국 당국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려는 움직임을 억압하는 대신,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로 과거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백악관도 4일 성명을 내어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가 요구했던 표현과 언론, 집회·결사의 자유는 중국 헌법에도 명시돼 있다”며 “중국 정부는 25년 전 천안문 시위대 탄압 과정에서 사망·구금·실종된 이들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마잉주 대만 총통도 4일 성명에서 “중국 당국이 진지한 자세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재평가하고 비극이 재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홍콩 <명보>는 사설에서 “천안문 사태 뒤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중국 정부는 당시 인민들이 요구했던 반부패를 해결하지 못했고, 시민들의 시위를 여전히 ‘동란‘으로 잘못 규정하고 있으며, 재평가를 하지 못한 3가지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와 언론은 요지부동이다. 훙레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3일 “1980년대 말 중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풍파와 이와 관련한 모든 문제에 중국 정부는 일찌감치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며 재평가 요구를 일축했다. 4일 중국 관영언론들이 25년 전의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킨 것은 물론이고 온라인에서는 관련 검색이 철저히 차단됐다.
베이징/성연철 특파원 sychee@hani.co.kr
그로부터 꼭 25년이 흐른 4일 천안문 광장 주변 곳곳에 공안 차량과 공안요원들이 대거 배치돼 행인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1989년 중국 군 천안문 시위 유혈진압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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