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쯔밍
망명 권유 뿌리치고 베이징 남아
천안문 시위의 주역이자 40여년 동안 중국 민주화 운동을 해온 천쯔밍이 21일 베이징에서 숨졌다. 향년 62.
천쯔밍의 부인인 왕즈훙은 21일 밤 “천쯔밍 선생이 지병인 췌장암으로 21일 오후 2시50분 베이징에서 숨졌다”고 전했다. 1952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천쯔밍은 24살이던 1976년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장례식을 축소해 치르려는 장칭 등 4인방에 항의하면서 중국 현대사의 격랑 속으로 몸을 던졌다. 2년 뒤인 1978년에는 중국의 병폐를 지적하고 민주화,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시단 민주의 벽’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천쯔밍은 1980년대 중반 중국정치행정과학연구소와 베이징사회경제과학연구소를 창립했다. 천안문 민주항쟁 1년 전인 1988년엔 <경제학주보>를 인수해 사장으로 일하며 서구의 민주 사상과 경제 자유화 상황을 소개했다. <경제학주보>는 영향력이 날로 커지며 중국 자유화 운동의 대표적 잡지로 자리매김했고 이 탓에 천쯔밍은 천안문 시위의 ‘검은 배후’로 지목됐다. 1991년 ‘반혁명선동 및 국가전복죄’로 13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2002년 석방됐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그의 주변에 경찰을 배치해 지속적으로 그를 감시했다.
중국은 체제에 비판적인 그에게 부담을 느껴 여러차례 외국으로 이주시키려 했지만 천쯔밍은 이를 거절하고 끝까지 베이징에 남았다. 정치평론가와 자유기고가로 활동한 천쯔밍은 말년에 입헌정치 확립을 주장하며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기대를 걸기도 했지만 시 주석이 취임한 지 수개월 만에 “시진핑에게 헌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부질없다”고 실망을 토로했다.
중국의 민주화 인사들은 천쯔밍의 사망을 애도했다. 천안문 민주항쟁의 주역인 왕단은 트위터에 “40여년 동안 중국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스승이자 친구인 천쯔밍 형이 숨졌다”고 적었다. 역사학자인 푸궈융은 “(1976년) 4·5의 영웅, 베이징의 봄, 천안문 항쟁의 ‘검은 손’으로 불리던 사람”이라며 그의 일생을 애도했다.
베이징/성연철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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