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공식
1992년 11월 홍콩에서 반민간 기구인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와 대만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가 회담한 뒤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중화민국(대만)이 각자의 해석에 따라 명칭을 사용(一中各表) 하기로 한 합의로, 이후 양안 관계의 핵심원칙이 되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에, 대만은 각자 해석에 방점을 두고 해석하고 있다.
66년 만에 처음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의 정상회담에서 주도권을 잡은 쪽은 중국이었다. 회담을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시 주석은 양안(중국과 대만)이 같은 중화민족임을 강조하면서도 대만의 분리 독립엔 단호한 경고를 보냈다.
시 주석은 회담이 비공개로 전환되자 “양안 관계의 가장 큰 위협은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이라며 대만 야당인 민진당을 겨냥했다. 민진당은 친중 성향의 국민당과 달리 ‘92공식’을 인정하지 않고 대만의 독립을 지향한다. 차이잉원 민진당 총통후보는 여론조사에서 주리룬 국민당 총통후보를 크게 따돌리며 내년 1월 총통 선거에서 당선이 유력하다. 시 주석은 “대만 각 당파, 단체가 92공식을 견지하길 바란다. 대만 독립세력은 양안 관계의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 국가를 분열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양안 인민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시 주석의 발언은 총통 선거뿐 아니라 같은날 치러지는 대만 입법원 선거(한국의 총선)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한 베이징 외교소식통은 “중국은 국민당의 처지가 심각하다고 느끼고 있다”며 “총통 선거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해도 입법원 선거마저 국민당이 참패하면 양안 관계가 기반 자체를 상실할 것으로 우려한다”고 말했다. 마 총통도 서두부터 “92공식을 견고히 다지자”고 말했다. 시 주석과 마 총통 모두 민진당 견제라는 정치적 목적이 일치한 셈이다.
마잉주 “92공식 다지자” 화답
총통 선거 우세 민진당 협공
야당 총통후보 “밀실 정상회담 실망”
중국 전문가 “논의 내용보다
만남 자체가 의미” 평가
시 주석은 차이잉원 후보에게도 미리 ‘급격한 양안 정책 전환은 위험하며 중국과 협조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8일 평론에서 “대만이 92공식을 위반한다면 양안 평화의 배는 폭풍우에 뒤집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차이 후보는 “시-마 회동에 매우 실망했다. 밀실 정상회담을 추진한 마 총통이 대만의 정체성과 민주주의, 자유선거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민진당 지지자 수백명은 7일 회담 반대시위를 벌였다.
시 주석은 만찬에서 2013년 대만이 일본과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주변 12해리 안에 진입하지 않기로 한 내용의 어업협정을 거론하며 유감을 전했다. 시 주석은 “양안이 항일 전쟁 승리 70돌을 맞아 공동 역사서를 쓰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시 주석은 마 총통이 제안한 양안 핫라인 개설은 동의했지만, 대만을 겨눈 미사일 배치 재조정 문제에는 “대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마 총통이 “중국의 제지 탓에 국제사회 활동 참여에 애로가 있다“며 양해를 부탁한 것에도, 시 주석은 “사안 별로 판단이 필요하다”며 기존 태도를 고수했다. 중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 탓에 대만은 현재 22개국과만 국교를 맺고 있다.
전문가들은 내용보다 66년 만의 정상회담 자체가 새 이정표를 세운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만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중국은 이번에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깨면서까지 국가 원수 간 정상회담을 열었다. 주웨이둥 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은 <신화통신>에 “토론 내용과 성과보다는 만났다는 자체로 의미가 있다. 양안 소통에 큰 돌파구 구실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상 회담이란 선례를 만든 만큼 향후 정상회담이 이어질 물꼬를 텄다는 것이다. 알렌 칼슨 미 코넬대 부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 “이번 회담이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과 오바마의 쿠바 관계 정상화에 맞먹는다”고 말했다.
한편, 미 국무부는 존 커비 대변인의 성명을 통해 “양안 지도자 회담과 관계 개선을 환영한다. 긴장을 완화해 안정을 촉진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베이징 워싱턴/성연철 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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