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에 사상 처음으로 스모그 적색 경보가 내려진 8일 한 남성이 오염된 공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날 베이징에 등록된 개인 소유 차량의 절반이 홀짝제 시행으로 주행이 금지됐으며 공사 현장의 작업이 중단되고 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8일 아침 8시30분. 중국 베이징 동북부 외곽 차오양구 왕징에서 시내 중심인 궈마오로 향하는 길은 구름 속을 방불케 했다. 750년 역사의 고도는 고운 밀가루를 흩뿌려놓은 것 같은 ‘안개 성’으로 변했다. 이정표 구실을 하던 주요 건물들은 암울한 스모그 속으로 숨었다. 건물 외양 때문에 ‘왕팬티’로 불리는 거대한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건물도 코앞까지 다가가야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다. 택시가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마치 희뿌연 잿빛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차량들은 스모그로 가시거리가 짧아진 탓에 아침인데도 전조등을 켰다. 불빛에 반사된 미세먼지들은 제각각의 차량들이 레이저 광선을 쏘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켰다.
첫 적색경보, 휴교령 등 발령
병원마다 호흡기 환자 줄이어
“아이 위해 반드시 떠날 것”
“국가 발전의 대가” 반응도
출근길의 시민들은 노점에서 만두며, 죽, 유탸오(중국식 꽈배기) 등 요깃거리를 사들고 종종걸음을 쳤다. 시민들 대부분이 마스크를 써 시내 중심가는 마스크 박람회장을 연상시켰다. 하양, 빨강, 파랑 등 형형색색의 마스크부터 정화 장치까지 달린 첨단 마스크도 눈에 띄었다. 궈마오의 금융가에서 일한다는 20대 리아무개는 “지금은 일 때문에 베이징에 있지만 나중엔 아기를 위해서라도 이곳을 떠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다른 한 시민은 “건강과 인권을 희생할 만큼 경제성장률이 중요한 것이냐”고 되물었다. “스모그는 국가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다”(40대 금융업 종사자), “겨울엔 늘 스모그가 생기니 적응됐다”(20대 여성)라는 무덤덤한 반응도 적지는 않았다.
베이징시 환경보호국은 이날 오전을 기해 스모그 적색 경보를 발동했다. 베이징시는 2013년 스모그 경보 체계를 도입했는데 적색 경보를 발동한 것은 처음이다. 적색 경보는 미세먼지 농도인 피엠(PM)2.5(지름 2.5㎛ 이하의 초미세 먼지) 농도가 200㎍/㎥ 이상인 날이 사흘 이상 이어질 것으로 예상될 때 내리는 경보다. 청-황-오렌지-적색으로 나뉜 4단계 경보 가운데 가장 높은 경보다. 적색 경보가 내려지면 △각급 학교 휴교 △차량 홀짝제 △시내 공사 중단 △일부 오염배출 공장 가동 중지 △출퇴근 탄력 운용 등의 조처가 강제로 시행된다.
초유의 적색 경보인 까닭에 시민들은 전날 저녁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우리 아이 학교는 내일 휴교를 하느냐”, “출근은 해야 하느냐”는 물음을 쏟아내며 우왕좌왕했다. 아침이 되자 주택가는 휴일처럼 한산했다. 아파트 입구를 그득 메웠던 통학버스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병원 호흡기질환과엔 환자가 몰렸다. 차오양병원 쪽은 “닷새 동안 호흡기 환자가 500명을 넘었다”고 말했다.
답답한 하늘에 대한 불만은 정부로 향했다. 한 베이징 시민은 ‘스모그 때문에 답답하지 않으냐. 언제 나아질 것 같으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건 시다다(習大大·시진핑 주석을 이르는 말)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그는 “정부가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이렇다. 석달만 제대로 하면 개선할 수 있다. 나보다 훨씬 똑똑한 관료들이 방법을 모를 리 없다”고 말했다. 한 누리꾼은 ‘사람이 자초한 재앙(스모그)이 호랑이보다 무섭다’(人禍猛於虎)라고 썼다.
시민들은 당국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 대응에 곱지 않은 시각을 보였다. 중국 환경당국은 일주일 전인 1일 피엠2.5 농도가 1000㎍/㎥ 가까이 치솟았음에도 적색 경보를 발령하지 않은 채 한단계 낮은 오렌지색 경보만 내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시진핑 주석은 당시 파리 기후변화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번엔 스모그 농도가 300㎍/㎥가량이었음에도 지레 적색 경보를 발동했다. 관영 <환구시보>는 “인민들의 광범위한 비판 여론이 당국의 대응을 압박했다”며 “스모그 문제가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섰다”고 했다.
베이징/성연철 특파원 sych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