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야오방 위대한 혁명가로 재탄생
천안문 사태로 언급마저 금기시 ‘특별한 인연’ 후 주석 복권 주도
보수파 반발속 첫 90돌 행사, 전기 ‘후야오방전’ 전격 판매
1993년 4월15일 새벽 7시, 중국 장시성 공산청년성에 있는 후야오방 전 중국공산당(중공) 총서기의 묘지 앞에서 한참 동안 묵념하던 후진타오(63)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총서기! 오늘 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 왔소!” 당시 그는 중공 정치국 중앙위원이자 중앙서기처 서기였다. 그를 대동했던 공산청년성의 관계자는 크게 놀랐다. 1989년 6·4 학생운동 유혈진압이 벌어진 지 4년도 채 지나지 않은 당시, 후야오방(1915~1989)에 대해 ‘총서기’라는 호칭을 입에 올리는 건 당 고위간부는 물론 일반인도 조심스럽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와 후야오방의 인연=지난 9월 중국 지도부가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탄신 90돌을 기념하기로 결정한 건 외부 세계에 매우 이례적인 일로 비쳤다. 지난 2001년 중공 당 창건 80돌 행사 때까지만 해도 문헌이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후야오방이라는 이름은 전혀 거론되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기피 인물’의 탄신 90돌을 대대적으로 기념한다는 건 매우 갑작스런 변화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진타오 주석과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그리 뜻밖은 아니다. 홍콩 <아주주간> 최근호(20일자 발행)는 후야오방의 맏아들인 후더핑(63) 중공 중앙통일전선부 부부장 등 고위 간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후진타오와 후야오방의 숨은 관계를 밝혀냈다. 보도에 따르면 후진타오는 1981년 9월 중앙당교 청년간부반에서 학습하던 시절 당시 중국역사박물관 부관장이던 후더핑과 만난다. 1942년생 말띠 동갑인 두 ‘후’씨는 곧 의기투합해 친구가 됐고, 후더핑은 후진타오를 집으로 초청해 당시 중공 총서기이던 아버지 후야오방과 만나도록 다리를 놓았다. 후진타오는 아버지 후씨와도 첫 대면에서 뜻이 통했다. 그 뒤 후진타오는 자주 이 집을 드나들며 후야오방의 청렴결백한 기상, 실사구시와 인본주의 정신을 배웠다. 중공의 한 고위 관계자는 “후 주석이 정치가로서 후야오방의 품격을 깊이 존경하고 흠모해왔다”고 전한다.
1984년 12월 후야오방은 장시성 공산청년성을 ‘고찰(지방 순시)’할 때 특별히 후진타오에게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이 ‘고찰 여행’에서 아침저녁 밥상을 마주 대하며 후야오방은 후진타오를 매우 가까이서 ‘고찰’할 수 있었다. 며칠 뒤 후진타오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승진했다. “이것은 후가 오늘날 중국 최고 지도자의 길에 오르는 밑받침이 된 가장 중요한 계단이었다”라고 <아주주간>은 평했다. 후 주석이 왜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적지 않은 반대를 무릅쓰고 후야오방 탄신 90돌 기념을 강력하게 추진했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이런 정치적 성장과정이 설명해준다.
애초에 후야오방 탄신 90돌 기념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후진타오는 정치국 상무위원 9명 가운데 4명의 반대에 부닥쳤다. 황쥐(67) 부총리, 리창춘(61) 상무위원, 뤄간(70) 정법위 서기 등은 “후야오방을 기념하면 6·4(천안문사태)는 어떻게 하느냐”며 반대했고, 원자바오(63) 총리는 “자오쯔양은 어떻게 하느냐”며 반대했다고 대만 <중앙사>가 지난달 2일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후진타오는 “6·4 얘긴 접어두고 후야오방 동지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고 받아넘겼다. 황쥐 등이 “후야오방 동지와는 접촉한 적이 없어 그에 대한 개인 의견이 없다”고 하자, 후는 “의견이 없다면 (기념대회를) 하는 게 마땅하다”고 했다. 그는 또 원 총리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후야오방 동지는 16년 전에 세상을 떴고 자오쯔양은 막 세상을 떴다. (자오에 대해서는) 잠시 뒀다가 다시 얘기하자”고 설득해 결국 이들의 동의 서명을 모두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장쩌민의 오른팔로 알려진 쩡칭훙(66) 부주석이 후 주석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험난한 명예회복의 길=중공 중앙판공청은 지난 9월 당 내부에 ‘5호 문건’을 발표해 “△중공 중앙은 11월20일 인민대회당에서 후야오방 탄신 90돌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여기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참석하며 △<후야오방 문집>과 <후야오방전>을 출간하고 △장시·후난 등 지방의 기념활동에 동의하며 △모든 활동의 경비는 중앙 재정에서 출연한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 ‘5호 문건’ 대로 후야오방 탄신 90돌 행사가 진행됐을 경우 후야오방은 “자산계급 자유화를 추진해 결과적으로 6·4동란을 낳은 원흉”에서 “사심 없고 두려움 없는 개혁가”로 새롭게 재평가될 전망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내외 보수파에 의해 다시 제동이 걸렸다.
보수파들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 90돌 기념대회 즈음에 출간될 예정이던 <후야오방전>인 것으로 전해졌다. 모두 3권으로 이뤄진 방대한 이 전기의 집필에는 장리췬 전 중국공산청년단(공청단)중앙판공청 부주임(2003년 사망), 장딩(82) 전 공청단 중앙학교 공작부 비서 주임, 옌루핑 공청단 중앙서기처 비서, 리궁톈 전 중앙당교 교수, 탕페이 전 <중국청년보> 편집부국장 등 이른바 ‘원로 단파(공청단 출신)’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전기에서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여진 부분은 후야오방의 실각 과정이다. 후야오방은 1986년말 학생운동에 유화적이었다는 이유로 총서기직을 박탈당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이 전기의 원고에 따르면 학생운동 문제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은 ‘덩샤오핑의 퇴진 문제’가 핵심이었다. 후야오방은 1986년 10월 “당 지도부를 젊게 만들기 위해 ‘노인’들이 용퇴하자”는 덩샤오핑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정치국 회의석상에서 “덩샤오핑 동지를 포함한 지도부가 곧 물러나 젊은 지도자들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발언했다. 덩샤오핑은 후의 발언이 “자기 인물을 (당 중앙에) 심으려는” 권력투쟁의 신호탄으로 해석해 반격에 나섰다. 결과는 후야오방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전기는 또 “후야오방을 총서기 직에서 물러나도록 한 과정도 당헌과 당규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폭로하고 있다. 후야오방은 중앙전체회의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됐기 때문에 그의 파면 또한 중앙전체회의에서 결정해야 했음에도, “당시 중공 당내 ‘정치 노인’들의 모임인 ‘민주생활회’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후를 압박해” 결국 총서기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대혁명 때 ‘우파’·‘반동’으로 낙인찍혔다가 1976년 마오 사망 이후 마오쩌둥의 그림자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세력(이른바 ‘범시파’)에 맞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내건 후야오방의 치열한 투쟁의 결과 이런 죄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펑전, 보이보 등이 후야오방에 대해 “덩샤오핑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그를 격렬하게 비판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도록 만드는 씁쓸한 대목이다. 이 방대한 역작은 그러나 ‘당국’으로부터 “몇몇 문제들은 너무 민감하고”, “국가기밀을 건드리고 있는 대목도 있으며”, “일부 원로 동지와 유관 가족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내용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후야오방전>(인민출판사)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 90주년 기념일인 20일 전국 각지의 국영 신화서점에서 일제히 판매되기 시작했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후야오방전>의 내용에 대한 보수파의 반발은 후야오방 기념사업의 규모 축소로 이어졌다. 후야오방에 대한 ‘가해자’에 해당하는 ‘원로 동지’와 그 가족들의 반발로 인해 기념대회의 규모는 20일 당일 2000여명이 참석하는 대규모에서, 18일로 이틀 앞당겨 300여명이 참석하는 ‘후야오방 연구토론회’로 축소됐다. 또 애초에는 후 주석이 기념대회에서 후야오방을 재평가하는 ‘중요한 담화’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기념대회의 규모를 축소하면서 쩡칭훙 부주석이 주관하는 행사로 격을 한 단계 낮췄다. ‘민주’ 대신 ‘민생’ 추구=후 주석이 후야오방 탄신 90돌 기념대회를 추진해왔다고 해서 그가 후야오방의 정치노선을 그대로 되밟을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후야오방의 경우 △사상 해방 △언론 자유 △개인 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당내 민주화 등 중국공산당의 기준에서 볼 때 비교적 ‘급진적 정치개혁’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중국 지도부의 내부사정에 정통한 베이징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18일 “후 주석은 후야오방을 기념함으로써 그의 ‘개혁’ 이미지를 이어받으려 하지만, 그는 ‘민주’에 방점을 찍어온 후야오방과 달리 ‘민생’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후야오방 기념이 불러올 정치적 위험부담을 축소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후 주석이 추진하는 후야오방에 대한 ‘기념’이 그에 대한 ‘전면적 재평가’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아주주간> 최근호 또한 “후 주석은 후야오방의 기념을 통해 자신이 주창해온 ‘과학적 발전관’과 ‘화해사회의 건설’이라는 집권 목표를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고 평했다. 후야오방 탄신 90돌 기념행사를 둘러싼 중국공산당 내외의 논쟁에 대해 이 소식통은 이날 “후 주석이 최근 후야오방 기념사업을 추진한 것은 그가 중난하이에서 권력의 핵심을 상당히 장악했음을 뜻하며, 자신의 개혁 성향을 드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평가한 뒤, “그러나 후야오방 기념대회의 축소 조정을 볼 때 중국에서 정치 개혁과 관련한 문제는 여전히 보수파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의 시위 모습.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추모행사가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전기는 또 “후야오방을 총서기 직에서 물러나도록 한 과정도 당헌과 당규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폭로하고 있다. 후야오방은 중앙전체회의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됐기 때문에 그의 파면 또한 중앙전체회의에서 결정해야 했음에도, “당시 중공 당내 ‘정치 노인’들의 모임인 ‘민주생활회’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후를 압박해” 결국 총서기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대혁명 때 ‘우파’·‘반동’으로 낙인찍혔다가 1976년 마오 사망 이후 마오쩌둥의 그림자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세력(이른바 ‘범시파’)에 맞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내건 후야오방의 치열한 투쟁의 결과 이런 죄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펑전, 보이보 등이 후야오방에 대해 “덩샤오핑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그를 격렬하게 비판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도록 만드는 씁쓸한 대목이다. 이 방대한 역작은 그러나 ‘당국’으로부터 “몇몇 문제들은 너무 민감하고”, “국가기밀을 건드리고 있는 대목도 있으며”, “일부 원로 동지와 유관 가족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내용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후야오방전>(인민출판사)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 90주년 기념일인 20일 전국 각지의 국영 신화서점에서 일제히 판매되기 시작했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후야오방전>의 내용에 대한 보수파의 반발은 후야오방 기념사업의 규모 축소로 이어졌다. 후야오방에 대한 ‘가해자’에 해당하는 ‘원로 동지’와 그 가족들의 반발로 인해 기념대회의 규모는 20일 당일 2000여명이 참석하는 대규모에서, 18일로 이틀 앞당겨 300여명이 참석하는 ‘후야오방 연구토론회’로 축소됐다. 또 애초에는 후 주석이 기념대회에서 후야오방을 재평가하는 ‘중요한 담화’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기념대회의 규모를 축소하면서 쩡칭훙 부주석이 주관하는 행사로 격을 한 단계 낮췄다. ‘민주’ 대신 ‘민생’ 추구=후 주석이 후야오방 탄신 90돌 기념대회를 추진해왔다고 해서 그가 후야오방의 정치노선을 그대로 되밟을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후야오방의 경우 △사상 해방 △언론 자유 △개인 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당내 민주화 등 중국공산당의 기준에서 볼 때 비교적 ‘급진적 정치개혁’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중국 지도부의 내부사정에 정통한 베이징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18일 “후 주석은 후야오방을 기념함으로써 그의 ‘개혁’ 이미지를 이어받으려 하지만, 그는 ‘민주’에 방점을 찍어온 후야오방과 달리 ‘민생’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후야오방 기념이 불러올 정치적 위험부담을 축소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후 주석이 추진하는 후야오방에 대한 ‘기념’이 그에 대한 ‘전면적 재평가’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아주주간> 최근호 또한 “후 주석은 후야오방의 기념을 통해 자신이 주창해온 ‘과학적 발전관’과 ‘화해사회의 건설’이라는 집권 목표를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고 평했다. 후야오방 탄신 90돌 기념행사를 둘러싼 중국공산당 내외의 논쟁에 대해 이 소식통은 이날 “후 주석이 최근 후야오방 기념사업을 추진한 것은 그가 중난하이에서 권력의 핵심을 상당히 장악했음을 뜻하며, 자신의 개혁 성향을 드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평가한 뒤, “그러나 후야오방 기념대회의 축소 조정을 볼 때 중국에서 정치 개혁과 관련한 문제는 여전히 보수파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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