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병마용은 중국의 통일한 진시황의 부장품을 매장한 무덤이라고 지금까지 알려졌다. 시안/이종근 기자root2@hani.co.kr
중국 시안에서 발견된 병마용(兵馬俑)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와 중국 학계가 시끄럽다.
건축학자인 천징위안(69)은 최근 △진시황릉과 병마용 발견 지점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고대 제왕의 능묘가 남북을 축으로 배치되는 관례와 달리 병마용 갱은 진시황릉의 동쪽에 있어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별개의 유물일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고 중국 관영 <인민일보>가 1일 보도했다.
천징위안은 “진시황릉과 병마용 경계선 사이의 직선거리는 1.5km나 떨어져 있으며, 능 중심과 병마용갱 중심의 거리를 재면 이보다 더 떨어져 있다”며 “부장품을 그렇게 먼 곳에 묻는 것은 당시의 관행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병마용 같은 중요한 부장품을 능묘의 중심축 선상에 묻지 않고 여기서 벗어난 동쪽에 묻은 것도 당시 건축의 관행과 어긋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오늘날 학설에 따르면 병마용은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지 십여년이 지난 뒤 건설된 것으로 돼 있지만, 천징위안은 병마용 갱 안에 부장된 수레바퀴의 궤도가 같지 않아 통일 이후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잘 알려진 바 대로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한 뒤 수레, 도량형, 화폐, 문자 등을 통일시켰다. 진시황은 전국 통일 이전부터 진나라 안에서 반드시 같은 궤도의 수레를 사용하도록 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국내에서 자유로운 통행을 금지했다. 전국 통일 이후 수레 궤도의 통일은 전국 범위로 확대 실시됐다. 그런 진시황이 어떻게 자신의 부장품으로 쓰일 수레의 궤도를 통일시키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이다.
천징위안은 병마용 갱 안의 인형병사들이 입고 있는 옷색깔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한다. 병마용 갱의 인형병사들은 출토 당시 모두 붉은색 또는 녹색 상의와 자주색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진시황이 검은색을 숭상해 병사들의 복장을 검은색으로 통일시킨 일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은 보병과 기병을 주로 사용했지만 병마용 안의 병사는 전차부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이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상의 적지 않은 의혹을 제기한 뒤 천징위안은 자기 나름의 고증을 거쳐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 그보다 100여년 앞선 인물인 진선태후(秦宣太后) 미씨라고 주장한다. 그는 <서안부지> 등에 따르면 진선태후를 양려산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지점이 오늘날 병마용 출토 지점과 가깝다고 지적한다. 또 <사기·저리자열전>에 따르면 진선태후는 초나라 사람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왜 병마용의 머리와 복장이 당시 소수민족과 닮았는지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천징위안에 따르면 서기 전 306년 진나라 소양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선태후가 섭정을 했다. 그가 임종할 때 관례에 따라 그와 가까웠던 신하들은 순장당할 운명이었으나, 선태후는 순장을 원하지 않았다. 소양왕은 하는 수없이 실물 크기의 순장용 병사와 신하를 만들어 부장했으며, 선태후가 초나라 옛땅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하도록 꾸몄다는 것이다.
천징위안의 대담한 주장에 대해 고고학자들은 일단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 ‘중국 병마용의 아버지’라 불리는 위안중이(袁中一) 전 병마용박물관 관장은 “병마용 안에서 진시황의 아버지의 재상을 지낸 ‘여불위’란 글자가 새겨진 과(戈, 일종의 창)가 발견됐다”며 “여불위는 진선태후보다 100년은 후대의 인물인데 어떻게 진선태후의 부장품에 후대 인물의 이름이 새겨져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위안중이는 또 “사서에 보면 진시황이 능묘 건설을 시찰할 때 재상 이사에게 명령을 내려 300장(丈)을 더 확장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며 “병마용 갱은 바로 이 확장공사로 인해 능묘에서 떨어진 곳에 배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천징위안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그는 우선 “‘여불위’란 글자가 쓰여진 과(戈)의 경우 묘혈의 밑바닥층에서 출토된 게 아니라 중층부에서 발견됐다”며 “만약 병마용과 함께 부장된 것이라면 마땅히 밑바닥층에서 출토됐어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병마용 안에는 매년 퇴적물이 쌓여 들어왔으며, 일부 파괴당했기 때문에 ‘여불위’란 글자가 새겨진 과를 후대인이 가지고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또 ‘300장 확장설’에 대해 천징위안은 “당시 300장은 오늘날 690m에 해당하며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중심에서 2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300장을 확장했다고 하더라도 병마용은 그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건축학자 한 사람이 평생 연구를 통해 제기한 병마용갱의 주인에 대한 숱한 의문에 대해 기존의 연구자들이 아직 적절히 논박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중국 고고학계 내의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한겨레> 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이종근 기자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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