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흑해함대 자리한 전략요충지
다수 러시아계 사흘째 친러 시위
러 의원단은 ‘러시아에 통합’ 거론
미 “러와 협력 원한다” 거듭 달래기
다수 러시아계 사흘째 친러 시위
러 의원단은 ‘러시아에 통합’ 거론
미 “러와 협력 원한다” 거듭 달래기
25일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시청사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아닌 러시아 국기가 게양돼 펄럭였다고 영국 <비비시>(BBC)가 전했다.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흑해함대의 해군기지가 자리잡은 항구도시로, 러시아계 주민이 대다수인 크림반도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다.
우크라이나 과도정부 승인 문제를 두고 러시아와 서방이 정면 대립하는 가운데 지정학적 요충지인 ‘크림반도’가 갈등의 화약고로 떠올랐다. <에이피>(AP) 통신은 25일 세바스토폴에서 친러시아 시위대가 집회를 열어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수도 키예프의 정치인들을 거세게 비난하며 분리독립을 주장했다고 전했다. 크림반도 곳곳에서는 이날까지 사흘째 최대 수천명이 모이는 반키예프·친러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시위에선 “러시아여, 우리를 구하소서”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 시위 참가자는 <에이피>에 “도둑들이 권력을 잡았다”며 “키예프에서 권력을 잡은 파시스트들과 싸우려고 무기를 들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하원에서 옛 소련권 국가 문제를 맡은 레오니트 슬루츠키 위원장이 이끄는 대표단은 25일 크림반도를 방문해 ‘크림반도 통합 가능성’까지 내비치며 이런 지역 정서에 기름을 부었다. 러시아 정치인들은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실각하기에 앞서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서명한 권력 분점 합의안이 지켜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과도정부 출범을 준비중인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대통령 권한대행은 거세지고 있는 ‘분리독립론’에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계 인구가 많은 지역의 분리주의 위험을 논의하려고 사법당국과 만나겠다”며 “분리주의는 심각한 위협”이라고 말했다. 과도정부 세력은 정권을 잡은 직후에 친러시아 성향이 짙은 동남부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조처로 큰 반발을 샀다.
크림반도 등의 반키예프 정서는 뿌리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어 손쉽게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다. 크림반도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거쳐 1783년에 러시아 제국에 병합됐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흑해와 발칸반도로 패권을 확장하리라 우려한 유럽 열강이 19세기 중반에 이곳에서 크림전쟁을 벌이는 등 오래도록 동서의 각축장이었다. 면적은 한국의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흑해와 접하고 기후가 따뜻해 부동항이 있는 전략적 요충지여서다. 이런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때는 1954년이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이 연방의 일원인 우크라이나에 친선의 표시로 영토를 넘겨줬다. 하지만 인구 250여만명 가운데 러시아계가 67%이고 우크라이나계가 25%에 불과해 러시아와 밀착도가 높다.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을 선포한 1991년 전후로 분리독립과 러시아 통합을 주장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분출했다. 결국 크림반도는 1991년 이후 중앙정부와 협상 끝에 자치공화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로선 크림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기 어렵다. 세바스토폴에 흑해함대를 두려고 2042년까지 조차 협정을 맺은 상태이고, 러시아계 주민이 많으니 자국민 박해를 이유로 군사적 침공의 명분을 둘러댈 수도 있다. 러시아는 2008년 친미 성향으로 돌아선 조지아 침공 때도 러시아계 주민의 보호 요청을 이유로 들었다.
한편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이는 동과 서의 대립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이는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이들이 선택한 미래에 관한 문제인 만큼 우리는 러시아 및 다른 국가들과 함께 일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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