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제로섬 게임’…미국 웃고, 신흥국 울고

2009년 만기 도래 신흥국 총부채(달러)

2008년 신흥국 투자 줄어든만큼 미 국채보유 늘어
저소득국가 금융위기 악화…통화약세 이어져

‘4620억달러(약 715조원) 대 4560억달러.’

앞 수치는 지난 한해 동안 신흥국들에 대한 국외 민간 투자금의 감소액이고, 뒤는 같은 기간 외국 정부들이 보유한 미국 재무부 채권의 증가 규모다.

세계적으로 달러 ‘제로섬 게임’(참가자의 이득과 손실의 총합이 0이 되는 게임)이 펼쳐지고 있다. 승자는 미국, 패자는 신흥국들이다. 금융위기를 일으킨 가해자인 미국을 향해 달러가 모여들고, 피해자인 신흥국에서는 그만큼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8일 “세계가 확산되는 금융위기 앞에서 근심에 사로잡히면서, 이상하게도 문제의 진앙지였던 미국이 상대적으로 쉽게 돈을 끌어모으고 있다”며 “미국으로 돈이 쏠리면서, 다른 지역의 위기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세계로 번진 금융위기와 경기침체 속에서 미국 투자자들은 위험을 무릅쓴 외국 투자를 접고, 달러를 챙겨 자국으로 돌아와 안전한 재무부 채권을 사들이고 있다. 여기에 2조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외환보유고를 지닌 중국은 대외무역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이는 족족 미국 국채에 다시 투자하고 있다.

달러 수요의 확대는 달러 가치를 상승시키고, 미 정부가 경기부양책과 구제금융에 쓸 자금의 조달비용을 크게 낮추고 있다. 미국이 올해 1조7500억달러의 재정적자를 예상하고 있지만, 달러 가치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유로화 등 주요국 통화에 견줘 13% 이상 상승했다. 2년 만기 재무부 채권 금리(수익률)가 1%도 안 되지만, 투자자들은 부도날 염려가 없는 이 채권에 몰리고 있다.

반면 신흥국들은 달러가 빠져나가면서 중상을 입고 있다. 국제금융협회(IIF)는 올 신흥국들에 대한 외국 민간투자가 2007년보다 82% 감소한 1650억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에스워 프러새드 선임연구원은 뉴욕 타임스에 “신흥국으로 향하는 민간 투자자본의 흐름이 말라붙었다”며 “저소득 국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금융위기의 ‘3차 파고’”라고 말했다.

신흥국들의 통화는 달러에 견줘 지난해 하반기 이후 30% 정도 폭락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지난해 전세계에서 사라진 50조달러의 자산가치 가운데 약 5분의 1은 여러 나라들의 달러 대비 통화가치가 급락하면서 초래됐다고 9일 분석했다.

세계은행은 7일 129개국이 올해 약 2700억~7천억달러의 자금부족 현상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신흥국들은 부족한 달러를 메우지 못하면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신세를 져야 한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경제의 극심한 침체로 수출에 크게 의존해 온 신흥국 통화들의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프러새드 연구원은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이 곤경의 나락에 빠질 것이란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며, 베트남·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파키스탄·에콰도르 등을 잠재적 외환위기 위험 국가군으로 꼽았다. 극심한 환율가치 하락을 겪고 있는 동유럽 나라들에서는 집단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류이근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