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잇따른 금리 인하로 리라 가치가 최근 폭락하고 있는 가운데 수도 앙카라의 환전소 앞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앙카라/AFP 연합뉴스
‘경제 독립’을 내세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금리 인하 조처가 통화 가치 폭락과 물가 폭등을 유발하고 있다. 물가 상승 등으로 고통받는 서민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일 외환시장에서 터키의 통화 리라 환율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이날 한때 달러당 리라 환율은 지난 주말보다 10% 넘게 오른 18.4리라까지 치솟았다가 “자국 통화 예금 보호 조처에 나서겠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발언으로 13.15리라까지 떨어졌다. 화폐 가치가 하루 만에 30% 넘게 들썩인 것이다.
리라 환율이 요동치는 것은 중동의 대표 ‘스트롱맨’인 에르도안 대통령의 고집 때문이다. 리라 환율은 올해 초 달러당 7.4리라 수준에서 조금씩 오르다가 지난 9월 중순 터키 중앙은행이 금리를 19%에서 18%로 내린 이후 본격 상승세를 탔다. 중앙은행은 10월에 다시 금리를 16%로 내렸고, 11월과 12월에도 각각 1%포인트 인하했다. 미국 등 대다수 국가들이 코로나19 이후 수요 증가와 공급 경색으로 인한 물가 상승을 우려해 통화량을 줄이고 금리 인상을 검토하는 시점에 터키 홀로 ‘반대 길’을 간 셈이다. 그 여파로 리라 가치는 11월 한달 동안 28%나 떨어지는 등 끝없이 추락했고, 물가는 폭등했다. 지난 11월 공식 물가상승률은 21%에 달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대세를 거스르는 자신의 통화 정책을 “경제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19일 방송으로 중계된 연설에서도 “나에게서 다른 걸 기대하지 말라. 나는 이슬람교도로서, (고금리를 금지한) 종교적 교리가 요구하는 걸 지속할 것”이라며 금리 인하를 중단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나아가 “테러 조직, 국제 권력 집단에 저항했듯이 최근의 불안정에도 맞서나갈 것”이라며 자신의 조처가 외세에 맞서는 ‘경제 독립’임을 거듭 강조했다. 또 높은 환율이 수출, 국내 투자, 고용을 촉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행보에 대해선 코로나19에 따른 경제 침체와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려는 ‘도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달 초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면,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연합과 야당연합의 지지율이 나란히 39%를 기록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5년 사이 최저로 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대로 가다간 2023년 대선에서 패배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겨냥하는 계층은 보수적인 중·저소득 유권자들이라고 <로이터> 통신이 지적했다. 집권 정의개발당의 고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물론 우리가 어려운 시기에 들어갔지만,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며 선거 때가 되면 새 조처들의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리라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대외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구상이 성공할지는 불투명하다. 대표적인 고환율(낮은 리라 가치) 수혜 업종인 섬유 업계도 원료 가격 상승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최근 전했다. 의류업을 하는 사업가 와히트 이을마즈는 “달러가 서서히 오를 때는 아주 좋았으나 이제는 위험해졌다”며 자신의 회사가 앞으로 1년 동안 버틸 확률이 50%밖에 안 된다고 우려했다.
환율 폭등으로 외국 여행이나 수입품 구입은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 중산층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얼마 전 결혼한 한 20대 의사 부부는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에 “집이나 차를 사는 건 꿈도 못 꾼다. 우리는 매일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최근 이민을 준비하기 위해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잡지는 전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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