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23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의 남서부 주요 항구도시 오데사에 미사일 공격을 가해 생후 3개월 된 영아를 포함해 최소 8명이 숨졌다. 한 여성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부서진 건물에서 소방대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고 있다.오데사/AFP 연합뉴스
“난 전쟁을 멈추길 원한다. (우리 앞엔) 외교적 길과 군사적 길이 있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어렵다 해도 늘 외교적 길을 택할 것이다. 이는 수천, 수만,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 두달을 하루 앞두고 23일(현지시각) 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개전 이후 처음으로 키이우의 한 지하철역 지하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에 응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날 절실하게 강조한 것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전쟁의 ‘외교적 해결’이었다. “평화협상으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다. 만났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라 만나야 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 등 잔혹행위 탓인지 “우방국은 신뢰하지만 러시아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해 복잡한 속내를 드러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두 시간에 걸친 회견을 마친 뒤 회견 영상에 영어 음성을 입혀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2월24일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두달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핵을 사용하지 않은 21세기의 재래식 전투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연출했다.
러시아는 전쟁 첫날부터 키이우에 공수부대와 기갑전력을 집중 투입하며 젤렌스키 정권을 제거하려 했다. 러시아의 막강한 전력 앞에서 우크라이나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보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개전 이튿날 키이우의 밤거리에서 ‘지도부가 수도에서 결사항전하고 있다’며 국민들의 항전 의지를 북돋웠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놀라운 용기를 보이며 항전에 나서자 미국과 유럽도 적극 나섰다. 러시아에 가혹한 경제제재를 쏟아내고, 전폭적인 무기 지원에 나섰다. 저항에 직면한 러시아는 기갑부대 행렬이 도로에 70㎞ 이상 늘어선 모습을 노출하는 등 보급과 작전 운용에서 큰 허점을 보였다.
키이우를 둘러싼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쟁 수습을 위한 평화협상에 나섰다. 러시아는 3월29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5차 평화협상에서 “진전이 있었다”며 키이우 주변의 군사활동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동부 돈바스와 크림반도 영유권 문제에서 강경한 태도를 꺾지 않으면서 협상은 사실상 결렬됐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가 키이우 주변 도시에서 끔찍한 학살을 벌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키이우를 둘러싼 ‘1단계’ 전투가 끝나고 돈바스의 운명을 협상이 아닌 실력으로 정하는 ‘2단계’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1단계 전투는 러시아의 패배로 평가할 수 있지만, 전체 전황을 볼 때 러시아가 꺾였다고 평가하기는 이르다. 스콧 보스턴 미 랜드연구소의 선임국방연구원은 “러시아의 애초 고전은 러시아군의 능력보다는 지휘부의 판단 문제인 것 같다”며 “우크라이나군을 쉽게 봤다. 러시아가 그런 실패를 그대로 되풀이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2단계 전투의 무대인 동부 전선은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의 근거지인 돈바스이고, 남부 전선엔 러시아가 이미 합병한 크림반도가 있다. 보급로가 짧고 8년간이나 전투가 계속돼 러시아군이나 분리주의 세력에게 익숙한 곳이다. 전쟁 전 돈바스의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점령한 지역은 3분의 1 정도였으나, 최근 러시아군은 루한스크주의 80% 정도를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는 21일에는 러시아 본토와 2014년 3월 합병한 크림반도를 연결하는 최대 요충지인 마리우폴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이를 넘어 흑해와 면한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모두 장악해 우크라이나를 내륙 지역으로 고립시키려는 속셈까지 드러내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각) 밤 키이우의 한 지하철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첫 내외신 기자회견에 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제공
러시아가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미 국방부는 지난 2월 말 침공 초기에 견줘 러시아군 전력이 75%까지 떨어졌다고 평가한다. 군사정보 사이트 ‘오릭스’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탱크·장갑차 등 약 3천대의 장비 손실을 봤다. 서구가 지원한 대전차용 휴대용 미사일 ‘재블린’ 등의 공격에 따른 것이다. 미국 등은 러시아군의 전면 공세에 맞설 수 있도록 탱크·곡사포·자주포·전투기·헬기·장갑차 등 대형 공격무기를 잇따라 공급하고 있다. 미국의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24일 키이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한다. 미국이 이 전쟁에 대한 개입과 지원을 질적으로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미국은 그동안 우크라이나에 총 34억달러(약 4조3500억원), 유럽연합은 15억유로(약 2조200억원)의 군사지원을 결정했다.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일인 5월9일까지 승리를 선포하겠다는 계획이지만, 미국 등의 전폭적 지원을 등에 업은 우크라이나가 격렬히 저항하면 목표 달성에 실패할 수도 있다. 러시아가 이 과정에서 견딜 수 없는 국가 위신의 추락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면 ‘전술핵’을 쓰는 모험에 나설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전투에서 이길수록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고, 최종 승리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딜레마 상황’에 놓여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22일 “전쟁이 내년 말까지 계속되고 러시아군이 승리하는 현실적 가능성도 있다”며 적극적 지원을 강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주장대로 ‘외교적 해법’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상호불신이 너무 깊어 전쟁은 당분간 강 대 강의 대결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