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시민들이 우루무치 화재 참사를 추모하는 백지 시위를 벌였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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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4일 저녁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최대 도시 우루무치 화재 참사가 중국 인민의 인내와 역린을 건드렸다. 무능력 혹은 무신경한 것처럼 보이는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 무고한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분출됐다. 그것은 ‘오늘날 중국인들은 억압과 불평등마저 감내할 정도로 잠들어 있다’는 식의 편견과 비난을 무너뜨렸고, 국외의 혐중 논리를 온몸으로 반박했다.
신장에서 상하이까지 중국 전역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규모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1989년 이후 최대 규모의 전국 시위’라 평가된다. 며칠 앞서 20만명이 일하는 폭스콘 공장에선 신세대 농민공들의 고강도 시위가 있었고, 주말 사이 162개 대학에서도 청년들의 항의 행동이 펼쳐졌다. 광저우 허우자오촌에선 최루탄까지 등장했다. 상하이와 베이징 시위에선 수백명이 “시진핑은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시진핑 집권 3기는 광범하게 확인된 대중적 불만, 통치의 불안정과 함께 출발한 셈이다.
중국공산당은 ‘외부세력 개입론’을 꺼내들었다. 당기관이 이견을 말하는 이들에게 ‘외부세력’ 딱지를 붙이는 순간, 누구에게든 ‘국가정권전복죄’의 칼날이 다가올 수 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 ‘백지’를 들었고, 당당하게 구호를 외쳤다. 한 대학생이 백지를 들고 침묵 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이 운동은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통제하는 중국 지배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배경으로 한다. 상하이 시위에 참가한 어느 청년은 “정부의 억압이 인민의 마지노선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칭화대학 학생식당 앞에 모인 수백명의 학생들 역시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 추모와 정부 방역 정책 비판을 위해 시위를 열었다. 한 학생은 “‘죽은 동포들’을 위해, 사회인으로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인 것”이라며 시위 목표를 분명히 했다.
한데 이번 시위에는 하나의 퍼즐이 빠져 있다. 바로 ‘죽은 동포들’에 대한 질문이다. 예를 들어 희생자들 중 하예르니샤한 압두레헤만(48)씨는 네 자녀와 함께 불길 속에서 사망했다. 14살 딸부터 5살 난 막내까지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20대 후반의 굴바하르씨 역시 그의 두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소방당국은 기자회견을 열어 책임을 주민들에게 돌렸고, 이는 사람들의 분노를 크게 분출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태원 참사 책임을 일선 경찰과 소방관에게만 돌린 우리 정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압두레헤만씨 가족의 남편이자 아버지는 어디 있을까? 엘리 메트니야즈와 그의 장남은 2017년 11월 신장 남부 모위현에서 체포됐고, 현재 악명 높은 재교육 수용소에 갇혀 있다. ‘동포’라는 호명에 위구르인들의 생존 문제가 감춰져 있던 것이다.
신장의 소수민족 주민들은 오랜 시간 고통받아왔다. 최근 출간한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생각의힘)에 따르면, 1990년대 지방정부의 한족 정착민 우대 정책과 종교 관례 통제는 위구르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중국 정부는 위구르인들의 시위를 ‘분리주의 운동’이라 칭했지만, 불평등과 종교의 자유 부재에 맞선 불만을 분리주의로 묶는 건 어색해 보인다. 한데 2001년 9·11 테러 이후 ‘동투르키스탄 테러리스트’라는 명명이 등장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에 동조하는 국가가 필요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중국 정부의 요구를 받아 별 영향력도 없던 소규모 조직 ‘동투르키스탄 이슬람당’을 테러리스트 목록에 추가했고, 위구르인들은 테러리스트 취급을 당하기 시작한다. 2009년 우루무치 폭동이 결정적 계기였다. 한족 노동자들이 위구르족 노동자를 린치한 일이 발생하자, 위구르인 학생들이 이에 맞서 시위를 벌인다. 그러자 경찰이 갑자기 실탄 사격을 가하고, 이는 대규모 시위를 유발했다. 130명이 넘는 한족 민간인이 사망한 끝에 폭동은 끝났지만, 이후 경찰은 몇달 내내 고강도 진압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인 수천명이 사라졌다. 악순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14년 중국 정부는 ‘테러와의 인민전쟁’을 선포하고, 2017년 인종주의 성격을 지닌 소수민족 억류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이것이 재교육 수용소 380여곳이 탄생한 배경이다.
수용소에 얼마나 많은 ‘메트니야즈’들이 갇혀 있을까? 과장 심한 반공주의 연구자는 180만명으로 추정하고, 혹자는 49만명이라 추정한다. 신장자치구 인민검찰원에 따르면, 2017~2020년 신장에서 공식 기소된 사람은 53만여명으로, 동기간 전국 평균보다 6배 높다. 그들이 바로 감추어지고 사라진 ‘동포들’이다.
백지 시위는 단순히 방역 정책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다. 경기 침체에 따른 불평등과 실업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통제가 불만으로 누적됐고, 억압적인 공안 정책이 화재 참사로 모순을 폭발시켰다. 정부가 아무리 감시·통제를 강화해도 억눌린 분노가 폭발하는 걸 막을 순 없다. 체제 안정을 위한 통제는 저항의 문턱을 높일 뿐,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민주와 평등을 원하는 중국 인민에겐 넘어야 할 벽이 있다. 바로 민족성분과 말투, 생김새로 나눈 인민 안의 경계다. 일부 광저우 시민들은 거친 시위의 주역이 외지에서 온 농민공들이라고 비난한다. 청두에서도 시위 비난 여론은 시위자들이 홍콩이나 대만 억양을 쓴다고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낸다. 호구와 집을 가진 주민들보다 가난하고 불안정한 신세대 농민공과 대학생들에게 ‘외부세력론’은 살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번 백지 시위에서도 농민공들은 누구보다 과격하고 집단적으로 투쟁했고, 이는 봉쇄가 야기한 ‘작은 불편’ 속 나름의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다른 주민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벼랑 끝에 선 빈곤 청년들은 몸으로든 입으로든 과격해질 수밖에 없다.
공권력의 강력한 통제와 분할 통치 앞에서 백지 시위 물결은 잠잠해진 듯하다. 정부가 방역 해제라는 대중의 요구를 곧바로 수용한데다, 시위 목소리의 정치성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차단한 효과가 먹힌 셈이다. 향후 국가권력의 통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나 인터넷 우회접속에 대한 처벌, 민간 행동 및 조직화에 대한 통제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시위 참가자들에 대해선 사후적인 처벌과 블랙리스트 작업도 이뤄질 수 있다.
중국 사회의 모순은 여전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 갈등과 대중 불만이 점증할 수밖에 없고, 불가피하게 더 많은 저항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저항엔 정확한 방향이 필요하다. 중국 사회운동의 질적 진전은 “재교육 수용소를 폐지하라”는 요구를 베이징의 한족 청년들도 외칠 수 있을 때, 폭스콘 노동자와 베이징의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연결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