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종식, 종교간 화해 큰 획
“민중 등불”-“독재 방관”평가 엇갈려
보수 교리 옹호 개혁 뒷걸음 비판도
교황은 10억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지도자만이 아니었다. 유일 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과는 다른 차원에서 지구촌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그래서 강대국과 독재자들의 그늘에서 신음하던 이들에게 그는 희망의 등불이었다. 따라서 그가 이런 간구에 응답하지 못할 때 소외된 이들의 실망감이 커지기도 했다. 그는 20세기 후반의 4반세기를 교황으로 재임하면서 세계사의 변화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공산국인 폴란드 출신으로서 냉전을 종식시키고 종교 사이 대화를 실현하기도 했다. 반면, 선대 교황들이 바탕을 다진 교회 진보의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종교간 화해=2000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발표한 ‘회상과 화해-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문건은 2천년 동안 가톨릭 교회 밖과 대화를 봉쇄해 온 ‘교황 무오류설’을 스스로 부인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교황은 중세 종교 재판과 십자군 원정 등 교회의 죄악을 참회함으로써 뒤늦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화해 정신 실천에 나섰다. 이 문건엔 애초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과 당시 교황청의 침묵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 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보수파들의 반발에 의해 삭제됨으로써 독일과 유대인 신학자들의 반발을 샀다. 교황은 어린 시절 유대인 친구 등의 영향으로 교회 밖과 다른 종교에 대해선 어느 교황보다 열려 있었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불교 신자들에게 축하 편지를 띄우는가 하면, 이슬람 지도자인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과 바틴칸궁에서 만나 “기독교와 이슬람교,기타 종교들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춤한 가톨릭 개혁=현대 가톨릭의 변화를 알기 위해선 요한 23세(1881~1963)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1958년 77살의 나이로 교황이 된 요한 23세는 4년 반의 재임 시절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해 독선적인 교회의 문을 바깥세상으로 활짝 열어젖혔다.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종결지어 과감한 가톨릭 쇄신을 단행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78년 즉위하기 전에 즉위 32일 만에 별세한 요한 바오로 1세가 있긴 했지만 그는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로부터 가톨릭교회를 현대에 맞게 쇄신해야 한다는 바통을 물려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가 교황이 된 뒤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다’는 논리가 세를 얻기 시작했다. 현재 새 교황 후보로 거론되는 교황청 라팅거 추기경(신앙교리성 장관)은 전대 교황 때는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쇄신을 이끌었으나 요한 바오로 2세 재임 뒤부터는 보수적인 교리 옹호주의자로 변신했는데, 그의 견해는 요한 바오로 2세를 대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은 교회 외적으로 ‘열린’ 모습과 달리 교회 안에선 이처럼 변화를 거부해 교황 요한 23세 이전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는 신학계의 평가를 받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보수 신학에 따라 낙태와 안락사, 동성애, 인간 복제 등을 엄금했다. 체세포 복제에 의한 복제양 돌리의 탄생에 이어 지난해 황우석 박사팀이 인간 복제 배아 줄기 세포를 확립하자 요한 바오로 2세는 “낙태와 안락사, 인간 복제는 인간을 명령에 의해 생사가 결정되는 단순한 사물로 격하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또 생명 문화와 함께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인권문제 엇갈린 평가=교황은 독재에 의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주 발언했다. 실제 교황의 후원으로 자국의 핍박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가톨릭 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제3세계에서 인권의 희망이었다. 민주화를 갈망하는 나라들의 민중들은 교황의 방문을 학수고대하곤 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표적인 가톨릭 진보 평신도신문인 <내셔널 가톨릭 리포트>는 요한 바오로 2세가 핍박 받는 이들의 아픔에 구체적으로 부응하지는 못했다고 평했다. 엘살바도르 방문 때 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된 로메로 대주교의 무덤을 독재정권의 반대를 받아들여 방문하지 않은 것이나 독재에 항거하던 브라질 상파울루 주교 등을 모두 보수적인 주교로 교체해 사실상 남미의 민주화 운동에 찬물을 끼얹은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전을 일으키자 요한 바오로 2세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충돌을 촉발해 종교적인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며 전쟁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세계의 화약고인 중동에서 이슬람인들에 대해 그들의 처지에서 바라볼 줄 아는 드문 교황으로 평가받았다. 그에 대한 아랍권의 애도 표정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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