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에선 요즘 벚꽃 축제가 한창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포토맥강변에 흐드러진 벚꽃과 함께, 일본 공연팀의 전통문화 공연이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 앞에서 매일 열린다. 지난해 개관한 워싱턴의 새 명물, 2차 세계대전 기념관 역시 벚꽃으로 둘러싸여 있다. 워싱턴에 벚나무가 처음 심어진 건 1912년, 일본의 우정의 선물이었다. 1941년 일본이 몰래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자 강변의 벚꽃나무들이 밤새 베어진 일도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벚꽃 외교’는 다시 화려하게 폈다. 미-일동맹이 지금보다 더 강력했던 적이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와중에 한-미동맹은 더 왜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2차대전 이후 한국이 일본보다 미국에 중요했던 적은 없다.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다 지금은 일본에 객원연구원으로 가 있는 로버트 듀자릭은 ‘미국이 한-미동맹을 미-일동맹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그런 적 없다. 일본은 언제나 아시아에서 미국의 핵심국이었다. 한국의 중요성은 부분적으로 일본 방위와 관련이 있다”고 잘라 말했다.
지난해 3월 헤리티지재단의 이병철 기념강연에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이 연사로 초청됐다. 이 강연은 헤리티지재단에 거액을 기부한 삼성 창업자 이병철씨를 기리기 위해 매년 열린다. 당연히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대사를 비롯해 미국의 한국통들이 많이 참석했다.
연설 주제는 ‘아시아 민주주의와 미국의 외교정책’이었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얘기하면서 파월은 일본의 예를 장황하게 들었다. 한국은 타이와 함께 딱 한줄 언급됐다. 참석자들을 더 놀라게 한 건 파월이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을 언급할 때였다. 그는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아시아 동맹의 중추’라고 강조했다. 한국은 필리핀, 몽고, 싱가포르 등과 함께 저 뒤에 언급됐다. 한 참석자는 “파월이 혹시 미쓰비시나 소니 창업자의 기념강연으로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이러니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국의 이름을 들면서 한국을 뺐다는 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지난달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 어느 조간신문의 특파원은 최근 한-미관계에 대해 “그래도 한국은 미국에 할 말을 하는 것 같아 부럽기도 하다. 일본은 그런 건 엄두도 못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갈등이 좋은 건 아니지만 때론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그걸 인정하고 그에 걸맞는 관계를 정립해 나가면 된다.
최근 독도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놓고 ‘미국이 왜 가만 있느냐. 결국 일본 편 아니냐’는 시각이 국내엔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역사교과서 논란은 유감스럽다”는 미 국무부의 한마디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 우리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물론 일본 태도의 문제점을 미국사람들에게 정확히 설명하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미-일관계나 한-미관계를 고려하면, 미국이 가만있는 게 우리에게 그리 부담스런 일은 아니다. 과거 미국이 한-미동맹을 생각하는 수준에 비해 우리가 미국에 갖는 기대가 너무 컸다면, 이젠 그 수준과 기대를 맞출 때가 된 듯도 싶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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