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천안문 시위 학생 지도자 우얼카이시가 19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류샤오보 사망의 주요 책임은 중국에 있다. 하지만 할 일 안 한 (민주주의 국가) 정부들도 류샤오보의 상황에 책임져야 한다. 우리는 눈을 뜨고 중국의 양심적 반체제 인사가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 그의 아내 류샤를 구출하는 데도 실패한다면 세상을 뜬 류샤오보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한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다 책임이 있다. 한국도 민주주의 국가다.”
1989년 중국 천안문 시위의 학생 대표였던 우얼카이시(49)는 19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한 기자회견에서 “선생님이자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류샤오보의 죽음을 막지 못한 국제사회를 질타하며 열변을 토했다. 당시 베이징사범대 학생으로 리펑 총리와 면담하면서 거침없이 발언해 세계적 주목을 끈 28년 전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대만에서 정치평론가로 활동하는 우얼카이시는 국경없는기자회 명예이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우얼카이시와 동료들은 중국 정부가 ‘류샤오보가 위중하다’고 발표했을 때 상황의 심각성을 직감했다. 천안문 시위의 또다른 학생 대표로 대만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왕단 등과 함께 류샤오보의 임종과 류샤의 신변 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은 대만 국회에 요청해, 류샤오보가 대만에서 치료받게 해달라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까지 곧바로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으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전 류샤오보가 세상을 떠났다.”
우얼카이시는 “천안문 사태 이후 28년 세월에서 가장 슬펐다”고 참담한 심정을 표현했다. 그는 “류샤오보는 암 말기로 숨지기 3주일 전에야 가석방돼 치료를 받았고, 의료진을 만나 자유로운 국가에서 죽고 싶다는 마지막 희망을 말했다”며 “그의 사망은 (중국의 방치에 의한) 암살이라는 단어 이외에 어떤 단어로도 적당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류샤오보의 동료들은 이제 류샤의 가택연금 해제와 해외 출국 해법을 고민하고 있다. 우얼카이시는 “서방 국가들은 경제적 피해를 입을까봐 중국을 직접 압박하지 못한다”며 “시민단체들이 선봉에 서서 공개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들에 촉구를 하면, 지도자들이 (여론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류샤를 출국시키라고) 압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대만이나 미국 등에서 류샤오보를 추억할 수 있는 추모비 건립과 추모거리 조성, 추모일 지정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얼카이시는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를 두려워한다”며 “중국엔 수장이라는 풍속이 없는데, 류샤오보를 추모할 곳이 생기는 걸 막고 싶어 풍속이라고 둘러대고 바다에 뿌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우얼카이시는 천안문에서 각별했던 류샤오보와의 추억도 털어놨다. 미국에 있던 류샤오보는 1989년 4월 천안문 시위가 시작되자 급거 귀국했다. 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된 6월4일까지 우얼카이시와 늘 함께했다. 우얼카이시는 “류샤오보는 당시 학생운동의 중요한 고문 역할을 했다”며 “학생 지도부가 외친 구호들도 류샤오보가 직접 귀엣말로 전해준 것”이라고 회고했다. 학생들이 천안문에서 가장 많이 외친 ‘화평이성’(평화적이고 이성적인 시위) 역시 류샤오보한테서 나왔다고 했다. 우얼카이시는 “전국 수백개 도시에서 수천만명이 동참한 큰 규모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시위가 폭력적, 비이성적으로 흐르면 사상적 영향이 어마어마할 것으로 우려됐다”며 “류샤오보는 (천안문) 운동 초기에 학생들이 잘못하지 못하게 하는 선생님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탈진실 시대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열린 국경없는기자회 회견에는 크리스토프 들루아르 사무총장과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시린 에바디 명예이사 및 김주언 한국기자협회 고문 등이 발제자로 나섰다. 들루아르 사무총장은 류샤오보의 죽음을 ‘민주주의 정부(국제사회)의 나약함’ 탓으로 돌리며 살아남은 류샤를 위해서라도 국제사회가 중국을 압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란의 인권변호사인 에바디는 “우리의 의무는 류샤오보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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