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미 본토를 겨냥할 수 있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했다. 신형 ICBM은 화성-15형보다 미사일 길이가 길어지고 직경도 굵어졌다. 바퀴 22개가 달린 이동식발사대(TEL)가 신형 ICBM을 싣고 등장했다. 노동신문 누리집 갈무리.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북한이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신형 무기를 공개한 데 대해 10일(현지시각) “실망스럽다”며 비핵화 협상 복귀를 촉구했다. 북한이 열병식 및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설에서 한국과 미국에 공격적 메시지를 자제하자, 미국도 원론적 수준에서 반응하면서 추가 자극을 피하는 모습이다. 이번 열병식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미 대선(11월3일)에 미칠 영향도 거의 없을 걸로 보인다.
미 행정부 당국자는 한국시각 이날 0시부터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열병식에 대한 <한겨레>의 질의에 “북한이 금지된 핵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계속 우선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제시한 비전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대화에 관여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북한은 열병식에서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를 갖춘 것으로 추정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기존의 화성-15형보다 길이와 직경이 증가한 신형 미사일을 공개했다. 또 지난해 발사한 북극성-3형보다 직경이 커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선보였다. 김 위원장은 연설에서 “자위적 정당방위 수단으로서의 전쟁 억제력을 계속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미 행정부의 반응은 북한이 지난 2018년 이후 미국과 대화가 시작된 뒤에도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고수하는 데 대해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북한에 지금까지 보여온 태도와 다르지 않다. 미 국방부도 존 서플 대변인 논평을 통해 “우리는 열병식과 관련된 보도를 인지하고 있다. 우리의 분석작업이 진행 중이며, 이 지역의 동맹들과 협의하고 있다”는 원론적 반응만 내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0일 밤 현재까지 북한 열병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동안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나 핵실험을 용납할 수 없는 ‘레드 라인’으로 간주해왔다. 북한이 이번 열병식에서 과거보다 발전된 무기를 공개하긴 했으나, 이를 시험발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선을 앞두고 외부 상황을 관리하는 쪽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북한 전문가인 켄 고스 미 해군분석센터(CNA) 적성국분석국장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북한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정하지 않은 채 신형 무기라는 옵션들을 열어놓고 미국 대선을 기다리는 것”이라며 “미국 또한 이를 호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에 밝혀온 입장을 재확인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번 일로 미국과 북한의 긴장이 고조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상유지인 셈”이라고 말했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도 트위터에 “열병식은 도발적이 아니라 과시적이었다”고 짚었다. <뉴욕 타임스>도 서울발 기사에서 “김 위원장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고 보여주기만 함으로써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하지 않으려 한 것 같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고 전했다.
북-미가 올해 열병식을 비교적 차분하게 넘어가는 데에는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 신뢰 관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 부부가 이달 초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자 쾌유를 비는 위로전문을 신속하게 보냈다. 지난달 출간된 밥 우드워드의 책 <격노>를 통해 공개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사이의 2018~2019년 편지들에서도 두 사람의 각별한 관계가 드러난 바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북한의 무기가 진화한 데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다. 핵 비확산 전문가인 비핀 나랑 매사추세츠공대 교수는 트위터에 “북한은 시스템 개선과 증강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상적인 핵무기 강국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며 “그들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멜리사 해넘 스탠퍼드대 열린핵네트워크 연구원은 <로이터> 통신에 “이번 미사일은 괴물”이라고 말했다. 클링너 선임연구원도 트위터에 “분명한 메시지는 미국의 주장과 달리 핵 위협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누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든 북한이 2021년 초에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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