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의 내셔널몰에서 5일(현지시각) 활동가들이 코로나19 백신의 자유로운 사용(지식재산권 효력의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미국이 5일(현지시각) 코로나19 백신 관련 지식재산권 효력 일시 중지(특허 효력 일시 정지)를 공식 지지하고 나섬에 따라, 세계무역기구(WTO)가 5~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 문제를 본격 논의할 예정이다. 세계무역기구가 백신 지재권 중지 논의에 합의할 수 있을지, 합의한다면 백신 생산이 빠르게 이뤄질지, 다른 걸림돌은 없는지 등을 점검해본다.
세계무역기구는 회원국이 164개국에 이르지만, 크게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선진국과 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을 중심으로 한 개발도상국 진영으로 나뉜다. 양쪽은 많은 쟁점에서 서로 충돌하는데, 백신 특허 중지 요구는 지난해 10월 인도와 남아공이 처음 제안했다. 현재는 100여개국이 이 제안을 지지한다. 미국은 그동안 유럽연합 등과 함께 이 논의에 반대했으나, 이번에 개도국 제안 지지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세력의 균형추는 개도국 쪽으로 기울게 됐다. 국제 여론도 개도국 편이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와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학자들은 지난달 개도국의 요구를 지지하는 편지를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낸 바 있고, 국제구호단체 등도 백신 특허 정지를 옹호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체로 거대 제약회사를 갖고 있는 나라들이 코로나19 백신 특허 중지에 반대해왔다. ‘국경 없는 의사회’ 조사에 따르면 유럽연합, 영국, 스위스, 노르웨이, 캐나다,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등이다. 이들은 코로나19 백신이 선례로 작용해 다른 특허 의약품의 복제약 허용 요구도 거세질 것 등을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미국의 태도 변화 이후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불분명하다고 <로이터> 통신은 지적했다.
제약업계는 특허 효력을 중지해도 백신 생산이 곧바로 늘지 않을 것이고, 질 낮은 백신이 생산될 위험도 있다고 주장한다. 또 일부에서는 화이자와 모더나가 생산에 성공한 전령아르엔에이(mRNA) 관련 기술이 중국과 러시아로 넘어갈 것을 우려한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전했다.
이 가운데 생산 증대 효과가 크지 않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지재권 면제 조처가 기존 백신 생산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뿐더러, 기존 제조사들이 제3세계에 공급할 만큼 백신을 생산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지재권 면제는 올해 하반기나 내년부터 더 많은 백신을 더 싸게 공급할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백신 제조사들이 세계에 백신 공급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며 “기술 이전을 통해 생산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무역기구가 회원국의 만장일치 합의를 도출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하지만 회원국들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대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무역기구의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에는 특허 강제실시권 조항이 있다. 이 조항은 국가비상사태나 긴급상황 등 예외 상황에서는 회원국 정부가 특허권자의 동의 없이 특허 사용 허가를 내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문제는 개별 국가 차원에서 이런 조처를 취할 경우, 지재권 소유 기업의 소송 등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영국 소재 과학정보 분석 기업 에어피니티에 따르면, 북아메리카와 유럽 이외 국가 가운데 백신 생산 능력이 있다고 평가되는 나라는 인도, 중국,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 등이다.
하지만 백신 원료 공급이 전세계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미국과 유럽 등의 원료 생산 업체가 협력해주지 않는 한 백신 생산은 쉽지 않다. 결국, 세계무역기구 차원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국제 협력이 전세계의 백신 부족 현상을 해결할 최선책이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