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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만화를 읽어주는 남자

등록 2007-01-21 21:42

만화를 읽어주는 남자
만화를 읽어주는 남자
도쿄 공원서 ‘영업’…살림 팍팍해도 즐거워
지난 14일 오후 일본 도쿄도 무사시노시와 미타가시에 걸쳐 있는 도립 이노카시라 공원. 일요일을 맞아 아티스트 지망생들의 ‘성지’로 알려진 공원답게 곳곳에서 각종 공연이 한창이다. 입구 바로 앞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는 대학생 차림의 남성 바이올린 4중주단이 꽤 수준높은 크로스오버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바로 그 옆 공간에서는 동물복장을 한 30대 남자가 판토마임으로 관객의 눈길을 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연극무대가 펼쳐진 듯 열정적이고 과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묶은 남자의 손에는 만화가 들려 있다.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만화의 등장인물에 따라 목소리 크기와 색깔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바로 옆에 쭈그려 앉은 관객에게 내용을 재미있게 들려준다. ‘만화를 읽어주는 남자’ 도호 리키마루(32)는 일본 유일의 ‘만독가’로 알려져 있다.

2004년 7월 처음 출연한 도쿄의 한 지역방송에서 그에게 ‘만독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후지텔레비전> 등이 그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방송광고에도 두 편이나 출연하는 등 제법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하지만 그는 프리터(아르바이트만으로 살아가는 젊은이) 생활을 하는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팍팍한 삶의 주름살이 펴지지 않는 ‘워킹 푸어’의 한 명이다. 손님이 만족하면 100엔 가량 받고 자신은 과자를 건네준다.

일요일에 공원에서 일을 하고 평일에는 시내 역 앞에서 밤 8시부터 10시까지 공연한다는 그는 이렇게 해서 한 달에 10만엔 가량을 번다. 월 3만엔의 집값을 내고 나머지로 그럭저럭 생활한다고 한다. 그래도 70만엔의 빚을 지고 있다. 깨진 뿔테안경을 테이프로 붙여서 그대로 쓰고 있는 모습은 궁핍한 그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생활할 수 있으니까 감사한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일본은 축복받은 나라”라고 말한다.

포크 싱어와 연극배우를 지망했던 그는 발성 연습차원에서 만화를 읽는 연습을 하다가 4년반 전부터 본격적으로 만화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3~4살 때부터 만화에 빠져 집에 500~600권의 만화를 보유하고 있다. 고교 졸업 뒤 상경한 그는 도로공사, 건축현장 잡역부 등 육체노동과 프리터 생활을 하면서 버블 경제가 꺼진 도쿄의 거리에서 힘들게 20대를 통과해왔다.

고교 졸업 뒤 1년 간 집에 틀어박혀 만화를 읽으며 두문불출하는 생활(히키코모리)을 했다는 그는 아직도 “사람 대하는 게 서투르고 잘 얘기하지 못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람에게 만화를 읽어줄 때 좌중을 휘어잡는 당당한 태도와는 달리, 막상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에 깍듯하게 대해 마음을 짠하게 했다.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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