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는 항상 텔레비젼을 틀어 놓고 있습니다. 두 가지 방송을 틀어 놓고 있습니다만 하나는 영국의 BBC, 또하나는 인트라넷을 통해 들어오는 국회 본회의나 각 위원회 중계입니다.
얼마 전 예산 위원회의 중계를 틀어 놓고 일을 하던 중, 좀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국회 중계나 질의 답변 등을 들으며, 지금까지 모르는 단어나 표현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야당 자민당의 중진인 카토 의원이 하토야마 총리에 대해 하던 질문 내용 중 일본에 온 이래로 처음 듣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화면을 보았습니다. 자막이 흐르고 있었습니다만, 그 단어는 카타카나로 표현되어 있었죠. 전후 문맥에 비추어 뜻은 알 수 있었습니다만, 저는 정확한 뜻을 찾고자 인터넷의 사전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다른 나라에서 사회생활을 할 경우, 그 문화권 독특의 표현이나 전통적인 문화 풍습에 대해서는 모르는 점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여러 계층, 나이의 그 사회 사람에게 물어 아는 경우도 있고 책을 읽어 아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업무에 관련된 용어라면 별개 문제가 됩니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고, 모르는 것은 자신의 태만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무실에서 어쩌다 보니 제일 ‘고참’의 위치이고, 업무에 책임을 가진 입장입니다. ‘외국인’은 저 하나 밖에 없으니, 이른바, 부하 직원들은 전부 일본 사람이며 이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죠. 그런 이유들에서도 업무에 관한 한, ‘철저함’을 가지려 노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처음 듣는 단어가 예산위원회의 발언에서 나왔다는 것이 저로써는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의 뜻을 알아보고 난 뒤, 저는 일종의 허탈감마저 느꼈습니다. 그 단어는 일본어도 아니고, 정확한(?) 외래어도 아니며, 섞인 외래어를 적당히 편집해 만든 표현이었습니다.
국회는 물론이고 지방 의회에서도 의회 내의 발언에 대해서는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즉, 차별 용어, 저속어, 비하어, 적나라한 표현 등은 제재를 받고, 속기록에서도 삭제됩니다. 무심코 그런 발언을 한 의원은 한동안 사죄를 하며 다녀야 하는 입장에 빠지고 문제가 심각해지면 다음 선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항상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의원 한 사람이 위원회의 질문 중 ‘가타오치’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가타오치란, 원래는 ‘완전한 형태가 아닌’ 이라는 뜻으로 회사나 제조업 현장에서는 금형으로 찍어낸 물건이 형태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 또는 유행이 지난 낡은 것의 의미로 씁니다만, 그것이 전화(轉化)되어, 장애를 가진 분을 비하하는 의미로도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 의원은 이번 법안이 내용이 부실한 점이 많다는 점을 이야기 하며 ‘가타오치’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이의원은 일반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그 단어에 대해 특별이 차별을 의미하는 뜻으로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차별어’를 썼다는 이유로 엄정주의를 받고, 속기록에서도 삭제되고 본인은 거듭 사죄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번의 그 단어(외래어)는 좀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신참 의원도 아닌, 만년 여당이었던 자민당의 실력자인 의원이 수상을 향해 하는 질문에서 그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위화감이나 제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 단어가 이미 정착된 표현 그리고 외래어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게 아닌가 하고 느꼈지요.
그 단어는 ‘슈-루’라는 단어였습니다. 가토 의원은 수상의 답변에 대해, “총리의 답변은 너무 슈-루 해서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라고 했지요.
자막에는 ‘シュ-ル’라는 가타카나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뜻은 18세기 프랑스 예술의 한 흐름이었던, ‘쉬르레알리즘’ 즉, 초현실주의 라는 단어에서 뒷부분의 레알리즘을 영어의 리얼리즘으로 바꾸고 거기에 프랑스어의 ‘쉬르’는 그대로 붙여 쉬르리얼리즘으로 쓰이다가 생략해 앞부분의 ‘쉬르’만을 떼어 일본식 발음인 ‘슈-루’로 발음하는 하나의 단어로 정착시켜, ‘초현실적인’ ‘현실과 동떨어진’ 등의 의미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허탈하지요?
하지만, 이런 일들과는 별개 문제로, 공적인 자리에서의 언어 선택이라던가, 차별, 비하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에 대해서는 납득이 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할지라도,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충격 받을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도 ‘함께 사는 사회’라는 의미에서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이곳 블로그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기도 하지만, 공적인 영역이기도 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기자블로그의 글 제목이 이웃나라의 자연 재해를 ‘고맙다’고 표현 한 것이나, ‘혼(魂)없는 사생아’, ‘첩’ 등의 표현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려 죄송합니다만, 저희 집은 이산가족으로 조부, 조모의 얼굴을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로 부터 어린 시절, 할머니가 평소에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말이 거칠면 행동도 거칠어진다”, “열 친구 사귀려 하지 말고, 한 친구 버리지 마라” 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말이 거칠면 행동도 거칠어진다. 정말 요즘 들어 절실히 느끼는 말입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