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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배가 마을로 달리고 건물이 양철상자처럼 쓰러졌다

등록 2011-03-12 23:10수정 2011-03-13 14:24

12일 오전 도쿄역에서 뜸하게 오는 전철을 기다리느라 사람들이 계단 아래까지 가득 늘어서 있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12일 오전 도쿄역에서 뜸하게 오는 전철을 기다리느라 사람들이 계단 아래까지 가득 늘어서 있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특파원 르포]지진이 내 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너무나 차분한 일본, 일본인들
12일 오후 9시다. 대지진이 일어난 지 이제 만 하루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벌써 한달쯤 보낸 듯 하다.

지난 밤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현관 앞에 물과 비상식량, 담요를 비롯한 피난물품을 챙겨놓고 잠든 아이들 곁에서, 게센누마시를 뒤덮은 수㎞의 불길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봤다. 새벽녘에 겨우 잠깐 눈을 붙였다. 여진은 발생 간격이 넓어졌고, 강도도 약해졌다. 하지만 진동이 일어날 때마다 현기증이 난다. 화장실같은 좁은 공간에 가면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진이 내 몸 안에 들어와 있다.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은 어제 이와테현 가마이시시의 해안 마을에서 쓰나미가 몰려오는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을 또 방송하고 있다. 2시46분 지진이 나고, 싸이렌이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높은 지대로 서둘러 피신했다. 3시15분 바다를 바라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쓰나미’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지진 발생 35분만인 3시 20분, 거대한 쓰나미는 해안 마을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바다에 있던 배들이 마을 길을 내달리고, 건물들이 양철상자처럼 쓰러진다. 도미노처럼.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건물 고층에 서서 불안하게 쓰나미를 맞서는 듯 바라보는 모습도 있다. 높은 언덕위에 피한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쓰나미는 마을을 삼키고, 가마이시 시내를 향해 돌진했다.

그 시각 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다. 지진이 일어나자 회사에 긴급보고를 했다. 사흘전 M7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와는 느낌이 크게 달랐다. 도쿄에 온지 1년이 지나는 동안 M7 가량의 지진을 몇번 겪었지만, 이번엔 강도가 달랐다. 메신저에 이렇게 썼다. “엄청난 지진임다.”

12일 오전 도쿄역 앞 택시 정류장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12일 오전 도쿄역 앞 택시 정류장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 아이는 훈련받은대로 식탁 아래 홀로 쭈그려 앉아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아이를 끌어안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두려워하는 것은 나였다. 심한 진동이 삼십분 넘게 이어졌다. 기상청은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 도쿄는 쓰나미가 50㎝ 정도로 가볍다는 소식에 조금은 안도했다. 내가 사는 고토구는 도쿄에서도 쓰나미에 가장 취약한 저지대다. 바다로 이어진 운하와 강이 곳곳에 있다.

11일 오후 3시께 도쿄의 남쪽 하늘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다이바 쪽 건물 꼭데기층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상황이 긴박하면 피난하라고 권했다. 기사를 쓰는 것은 나중 일이고 우선 피난부터 해야겠다 싶었다. 현관 밖으로 나가자, 가스냄새가 진동했다. 엘리베이터는 멈춰있었다. 근처 공원엔 벌써 수십명이 모여 있었다. 진동은 계속됐다. 휴대폰은 먹통이 돼 있었다. 인터넷이 연결돼 있어서, 나중에 인터넷 전화를 쓸 수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뒤늦게 연락이 된 이들이 안전을 확인하고는 울먹였다. 그 순간에도 여진은 건물을 흔들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뒤 동북부 지역은 물론이고 수도권의 모든 전철·지하철이 운행을 멈췄다. 역마다 인파로 가득찼다. 당국은 무리하게 퇴근하려다보면 사고가 날 수 있다며 안전한 곳에서 밤을 보내도록 권했다. 갈곳 없는 사람들을 위해 공회당 등 공공기관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맞았다. 밤늦게 연락이 된, 일본에 온지 얼마 안되는 한 교민은 “회사 사람들과 회사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밤늦게 일부 전철이 운행되기 시작했지만, 극히 일부에 그쳤다. 사람들은 그렇게 ‘도쿄의 잠못 드는 밤’을 지냈다.


12일 아침, 휴대용 가스렌지로 물을 데워 고양이 세수를 했다. 어쩌면 이것도 호강이겠구나 싶었다. 우려했던대로 희생자는 10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피해가 큰 지역의 현장으로 갈 수 있을까? 도쿄 역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택시를 탔다. 택시 운전기사는 “60년을 도쿄에서 살았는데, 이런 지진은 처음 겪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엔 피해가 없느냐며, 한국인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위로하는 마음”이라고 대답했더니, “한국은 우리랑 친하니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중국 사람들은 안 그럴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어느 때고 자신들을 보는 사람들을 의식한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은 전혀 막히지 않았다. 주말인데다 지진 피해로 사람들은 외출을 삼가했다. 고토구의 스미요시역 근처에서 출발해 15분만에 도쿄역에 도착했다. 도쿄역은 열차 운행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러다 누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서울의 지하철 2호선처럼 도쿄를 빙둘러 도는 야마노테선이 제대로 운행하지 못하는 게 무엇보다 큰 문제였다. 도쿄 지하철은 일부 운행이 재개됐지만 평소의 30% 수준, 활발한 노선이 50% 수준이었다.

12일 오후 도쿄 고토구의 한 생활용품점에 손전등이 다 팔려나갔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12일 오후 도쿄 고토구의 한 생활용품점에 손전등이 다 팔려나갔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센다이로 가는 철길은 모두 끊겨 있었다. 신칸센 뿐 아니라, 보통 열차도 다니지 않았다. 며칠 동안은 운행이 어려울 것 같다며 역무원은 몇번이고 ‘스미마셍’이라고 말했다. 지진 피해 현장으로 떠날 서울의 취재 지원팀이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 집으로 곧장 오도록 했다. 지하철을 포기하고 다시 택시를 타기 위해 역을 빠져 나왔다. 택시정류장엔 100여명이 뜸하게 들어오는 택시를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었다. 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내달려,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았다. 택시운전사에게 물었다.

“센다이까지 얼마면 갈 수 있습니까?”

“고속도로가 정상이라면 12만엔이면 되는데, 지금은 국도로 가야하기 때문에 (미터요금으로) 20만엔은 각오해야 할 겁니다.”

꼭 가야 한다며, 센다이까지 데려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멀리 나가려면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회사의 허가가 있으면 갈 생각은 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많이 막혔다. 도쿄역에서 택시로 40분이나 걸렸다. 요금도 갑절 넘게 나왔다. 도심에 있던 사람들이 밤에 퇴근하지 못하고 이제야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까닭인 듯했다.

센다이로 가는 고속도로는 거의 전지역이 통행 금지 상태다. 일반도로로 돌고돌아 가야 한다. 경찰이 위험을 우려해 통행을 막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현장엔 가야 한다. 한 교민이 직접 데려다줄 순 없지만, 차는 빌려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감사했다. 지원팀에게 주려고 편의점에서 급한대로 몇가지 물품을 샀다. 평소보다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몇십 명씩 줄을 서 있어 계산하는데만 30분 가까이 걸렸다. 사재기를 연상시키는 구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차분한 일본 사람들!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모른다.

서울에서 온 지원팀은 간단히 점심을 먹고, 비행기를 타고 온 피곤한 몸으로, 안내원도 없이 직접 운전을 해가며, 언제 도착할 지 기약할 수 없는 위험한 길을 떠났다.

도쿄 사람들은 여진을 걱정한다. M8.8의 지진이 왔다면 한 달 안에 M7 규모의 지진은 오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은 말했다. 쌀을 사러 들른 편의점엔 즉석라면 코너가 텅 비어 있었다. 생활용품점에는 손전등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여진을 우려하고 있다.

새로운 걱정거리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다. 피난 범위가 점점 확대되더니, 오후 3시 넘어서는 폭발사고도 일어났다. 오후 6시께 당국은 발전소 주변 반경 10㎞ 이던 피난지역을 반경 20㎞까지 확대했다. 한 지인이 도쿄전력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온 메일이라며, 이렇게 ‘전달’해왔다.

“내일 아침이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더 생길 수도 있다. 절전에 협력해 달라. 전기가 끊어지면 물이 나오지 않을 수 있으니, 미리 물을 받아놓으라. 가능한 외출을 삼가하고, 피부가 노출되지 않게 하라. 코스모석유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로 유해물질이 섞인 비가 올 수 있으니 외출할 때는 우산을 꼭 갖고 나가서 몸이 비에 젖지 않게 하라.”

건물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쓰나미에 따른 직접 피해도 없었지만, 도쿄 시민들은 대지진 이튿날 밤도 제대로 잠들 기 어려운 상황이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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