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정
온 종일 양식이 비스킷 10개
추위에 발가락 감각 잃기도
잠 들려하면 여진 들이닥쳐
추위에 발가락 감각 잃기도
잠 들려하면 여진 들이닥쳐
남기정 교수의 ‘센다이 2박3일’
11일 오전 필자는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의 도호쿠대학 도서관에서 자료 조사와 복사를 반복하고 있었다. 도호쿠대학은 필자가 2000년대 초반 4년 동안 재직했던 곳으로, 세미나 참석을 위해 오랜만에 이곳을 다시 찾아온 터였다.
이날 오후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도서관에 들어선 순간, 갑자기 걸음이 뒤엉키는 것을 느꼈다. 유리창들이 흔들렸고 굉음이 들렸다. 일본에 체류할 때 몇 차례 지진을 겪었지만 처음 느끼는 강도였다. 출구로 되돌아 나오려는 순간 누군가 소리쳤다. “책상 밑으로!” 출구까지 불과 10m였지만, 그 소리에 압도당해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땅 위에서 마치 파도를 타는 느낌이 5분 정도 계속됐다.
잠시 대피했다 되돌아온 도서관은 정전으로 컴컴했고, 곳곳에서 누수가 일어났다. 도서관은 책장의 책들이 모두 떨어져 아수라장이었고, 필자가 작업을 했던 복사기는 원래 자리에서 3m 정도 떨어진 곳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도호쿠대학에서 시내에 있는 숙소까지 걸어가는 동안 무너진 담벼락과 쓰러진 가로등, 솟아오른 보도블록 등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센다이 시내에 붕괴된 건물은 없어 보였다. 거의 모든 편의점이 폐쇄된 상태였고, 공중전화 앞엔 긴 행렬이 보였다. 서울에서 로밍해 온 휴대폰을 보니 이미 불통이었다.
잠시 뒤 눈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시야를 가질 정도로 눈발이 심해졌다. 해가 졌지만 도시락은커녕 물 한 통도 못 사들고 숙소인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 관리인의 안내로 인접 학교 체육관으로 대피했지만 밤 11시까지 비스킷 10개를 얻은 게 전부였다. 물은 노인과 아이들에게만 배급돼 참아야 했다. 넓은 체육관에 가정용 난로가 2개뿐이어서, 눈길에 젖은 발가락은 감각이 사라진 듯했다. 도저히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칠흑 같은 어둠을 더듬어 담요와 이불이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3층 방은 불안해서 1층 로비에서 여진이 계속됐던 그날 밤을 견뎠다.
다음날 아침 주린 배를 쥐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다행히 센다이역 앞 재래식 시장이 열려 오이와 일본식 된장, 사과 등으로 배를 채웠다. 점심엔 소학교의 대피소에 가서 롤 카스텔라 두 쪽을 얻어먹었다.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지낸 퀭한 눈의 이재민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접한 엄청난 광경을 보고서야 센다이 총영사관으로 가서 가족들에게 무사함을 전했다.
예정됐던 세미나는 취소되었지만, 앞으로 며칠을 더 센다이에서 견뎌야 할지 막막했다. 이튿날 밤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이 감겨올 때마다 여진이 들이닥쳐 잠을 깨웠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등으로 굉음이 들려왔고, 모로 누우면 귀로 들려왔다. 엎어져 누워 있으면 굉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가물가물거리는 상태에서 전화가 울렸다. “니가타까지 나가는 차량을 확보했으니 1시간 안으로 오셔야 합니다.” 총영사관에서 온 전화였다. 힘들게 견디고 있는 센다이 시민들과 유학생들을 남겨두고 먼저 나가는 것 같아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차를 타기로 했다.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일상을 회복하기를 기원한다. 남기정 교수 서울대 국제대학원 일본연구소
예정됐던 세미나는 취소되었지만, 앞으로 며칠을 더 센다이에서 견뎌야 할지 막막했다. 이튿날 밤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이 감겨올 때마다 여진이 들이닥쳐 잠을 깨웠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등으로 굉음이 들려왔고, 모로 누우면 귀로 들려왔다. 엎어져 누워 있으면 굉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가물가물거리는 상태에서 전화가 울렸다. “니가타까지 나가는 차량을 확보했으니 1시간 안으로 오셔야 합니다.” 총영사관에서 온 전화였다. 힘들게 견디고 있는 센다이 시민들과 유학생들을 남겨두고 먼저 나가는 것 같아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차를 타기로 했다.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일상을 회복하기를 기원한다. 남기정 교수 서울대 국제대학원 일본연구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