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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기고] 기묘한 평온, 공황의 다른 모습

등록 2011-03-20 20:07수정 2011-03-21 09:01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어제(3월18일)는 맑게 갠 좋은 날씨였다. 나는 아내와 함께 도쿄 시내에 가보기로 했다. 내가 사는 ㄱ시에서 도쿄 중심부까지 가는 데 전철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집에서 ㄱ시의 역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어느 사이엔가 매화가 피고 벚꽃 봉오리가 부풀어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서로 몸을 기대듯이 하고 산책하는 고령의 부부가 스쳐 지나간다. 길옆 풀밭에서 유치원 아이들이 동그랗게 무리지어 제비꽃과 튤립을 심고 있다. 선생님 구호에 따라 손을 잡고 마음껏 소리치며 동요를 부른다. 언제나 변함없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나는 이 풍경이 내일, 아니 바로 다음 순간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바뀌어버리는 게 아닐까 내심 긴장하고 있다.

전철은 의외로 비어 있었다. 조명을 끈 역은 어둑했다. 지나가는 행인도 부쩍 줄었다. 모두 말이 없었다.

나는 한국영사관에 볼일이 있었다. 아내가 동행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런 때는 가능한 한 떨어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급한 용건은 아니었으나 나온 김에 도쿄 시내와 영사관 모습을 봐둬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영사관에 들어가 보니 그리 넓지 않은 대기실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대부분 임시여권을 발급받으러 온 사람들인 듯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한국적)이나 일본인과 결혼한 한국인 자녀들은 한국 여권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 앞에 줄을 선 한국인 여성은 고교생 정도로 보이는 아들의 여권을 신청했다. 그 앞의 남성은 일본인인 듯한데, 한국인 아내와의 사이에 난 아이의 여권을 신청할 모양이었다. 한국어를 못해 힘든 모양이었다. 휴대전화로 아내에게 “출생신고는 언제 했지?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어서 아직도 멀었어” 하는 얘기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모두가 “될 수 있으면 빨리 받을 수 있는 걸로” 임시여권을 신청했다. 한시라도 빨리 일본을 떠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굼뜬 편이다. 독일이나 프랑스는 이미 자국민에게 철수 지시를 내렸다. 내 지인들만 봐도 이미 몇 명이 황급히 일본을 떠났다.

조명 꺼진 전철역 썰렁
드문드문 행인들은 말 없어
한켠에선 봄꽃 심는 아이들…
한국영사관엔 여권신청 긴 줄
처참한 원전, TV선 보기 힘들고
다급한 ‘큰일’ 입밖 내는 이 없어…
가스곤로 사 집으로 오는 길
시커먼 건물 위로 검붉은 노을
“불길한 건 예뻐” 아내 말 맴돌고…


오랜만에 도쿄 시내에 나온 터에 외식이라도 해볼까 했으나, 언제 전철 운행이 멈추고 교통대란에 빠지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 도중에 우리는 대형 가전제품 가게에 들렀다. 혹시 전지를 살 수 있을까 해서였다. 역시 전지는 다 팔리고 없었으나 대신 프로판가스 곤로와 가스통을 샀다. 예상외의 행운이었다. 이젠 정전이 길어져도 물을 끓이거나 밥을 할 수 있게 됐다. 그 가전점에서 집으로 가는 지역 일대는 정전중이어서 짐을 들고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이미 도쿄의 슈퍼에서는 전지만이 아니라 생수, 쌀, 빵, 라면 등이 모습을 감췄다. 주유소에는 급유 순서를 기다리는 자동차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사람들 표정과 말투는 기묘할 정도로 평온하지만, 이 정도면 이미 의심할 여지 없이 공황상태다.

폭발을 거듭하며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 원자력발전소에 경찰과 소방차가 물을 끼얹고 있다. “어떻게든 냉각시키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정부도 전문가들도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 “큰일”이 어떤 건지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자신들도 잘 모르든지, 아니면 너무 겁이 나서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며 간 나오토 정권의 무능을 비판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올 지경이 됐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자민당 정권이라면 좀더 잘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원전 사고는 자민당 장기정권 시절의 쌓이고 쌓인 병폐들이 마침내 최악의 형태로 분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됐건 일본 정치에 큰 기대를 품고 있진 않다. 기대가 너무 크면 그 틈을 노리고 파시즘이 대두할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종적인 사망자 수는 수만명에 이르지 않을까. 전쟁을 예외로 하면 일본 사회가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대량사망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구원의 손길은 재난지에 가 닿지 못하고 텔레비전은 도호쿠 지방의 과묵한 이재민들 모습을 공허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 한켠에선 원전이 언제 파국을 맞아도 이상할 것 없는 줄타기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원전 피해를 너무 소극적으로 발표하고 있다는 의혹이 날로 짙어지고 있다. 자제하던 매스컴까지 요즘엔 정부와 도쿄전력에 대한 비판 강도를 높이고 있다. 원전에서 100㎞권 안에 있는 센다이시에서 지진 피해를 당한, 내가 아는 젊은 벗은 ‘안전’을 강조하는 정부와 도쿄전력 발표를 믿고 어린아이를 위험에 노출시킬 순 없다는 결심으로 이미 사흘 전에 야마가타현을 경유해 간사이 지방으로 탈출했다. 그는 센다이에 남아 있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가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외국의 내 지인들은 구체적인 논평이나 수치를 대면서 한시라도 빨리 가능한 한 서쪽으로 피신하라는 충고를 메일로 보내오고 있다. 광주의 ㅅ교수는 “살 집을 마련해둘 테니 빨리 한국으로 건너오라”는 친절한 연락까지 해왔다. 그러나 나와 아내는 의논 끝에 이곳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물론 앞날을 낙관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만 도망가는 게 미안하다거나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도 아니다. 지금 내 기분을 정확하게 표현하긴 어렵다. 다만 나치스가 대두한 뒤 홀로코스트 위기가 임박한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망명하지 않았던(또는 망명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을 거듭 떠올리고 있다.

집에 돌아와 창밖을 보니 전기가 끊어진 거리는 어둡게 가라앉았고 그 상공에 검붉은 노을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걸 보고 “예쁘기도 해라” 하고 아내가 말했다. 오히려 불길한 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잠시 망설이다 그 생각을 말했더니 “불길한 건 예뻐요” 하고 아내는 말했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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