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성산동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마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추모관에 지난 14일 오후 방문객들이 놓고 간 꽃이 놓여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1965년 이후 “개인 청구권 존재”
2000년대 들어 “모두 소멸” 주장
2000년대 들어 “모두 소멸” 주장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 문제와 관련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며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청구권 관련 입장은 애초 “외교보호권만 소멸했고 개인 청구권은 존재한다”였다가, “청구를 해도 응할 법적 의무가 없다”로, 다시 “청구권은 모두 소멸됐다”로 변해왔다. 이런 논리 변화는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꼼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9일 “일본 정부는 65년 청구권 협정 직후 외교보호권과 개인 청구권을 구별하고,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한 것은 외교보호권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말했다. 외교보호권이란 국가가 다른 나라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국민의 구제를 요구할 권리를 말한다.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은 실제 65년 11월 한-일 협정 체결 직후 ‘일-한 조약 및 협정 등에 관한 특위’에 출석해 “외교보호권만 포기했다”고 확언했다.
이는 당시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뒤 한국, 옛 소련 등과 청구권 협정을 맺는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개인 청구권 소멸을 인정할 경우 일본인의 한국과 옛 소련 등에 대한 청구권도 없어진다는 점이다. 외교보호권과 개인 청구권의 분리는 이를 피하려는 포석이었던 셈이다. 일본은 90년대까지 이런 논리를 유지했다. 야나이 슌지 외무성 조약국장은 91년 8월 참의원에서 “외교보호권을 상호 포기한 것이며 소위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일본의 태도는 바뀐다. 일본은 2003년 9월 강제징용 피해자의 공소심 준비서면에서 “한국인이 청구를 했다고 해도 우리나라(일본)는 응할 법적 의무가 없다”고 밝혔다. 겐바 고이치로 외무상은 더 나아가, 지난 5월 기자회견에서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로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못박았다.
이런 변화는 국제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반인륜적 범죄로 본격 부각되고, 일본에서 일부 ‘시효·제척 기간’ 등을 배제하는 판결이 나오면서, 새로운 대응 논리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창록 교수는 “9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나치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소송 제기를 2010년까지 허용하는 ‘헤이든법’을 통과시켜, 과거청산의 시효 문제를 입법적으로 해결했다”며 “이는 일본이 시효 등을 이유로 피해구제를 거부하는 것이 국제 사회에서 용인되기 어려워진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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