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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일본 시민단체, 아베 맞서 ‘진보교과서 구하기’

등록 2013-09-22 19:34수정 2013-09-22 21:11

지난 18일 오후 일본 도쿄 분쿄구의 분쿄구민센터 2층에서 역사 교과서 운동단체 회원들이 진보 성향 역사 교과서 채택을 가로막은 도쿄도 교육위원회의 결정을 비판하고, 아베 정권의 교과서 개입 움직임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하는 모임을 열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일본 도쿄 분쿄구의 분쿄구민센터 2층에서 역사 교과서 운동단체 회원들이 진보 성향 역사 교과서 채택을 가로막은 도쿄도 교육위원회의 결정을 비판하고, 아베 정권의 교과서 개입 움직임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하는 모임을 열고 있다.
도쿄교육위 “짓쿄출판사 책 채택말라”
‘압박’ 전화 통해 학교 자율권 침해
자민당, 통제 위해 법 제정도 추진

시민사회, 반대운동 확대 나서
“교육으로 젊은이들 역사관 바꿔
전쟁가능한 나라 만들려는 의도”
“역사를 직시하고 제대로 공부한 다음에 (국가에) 자긍심을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모르면서 자긍심만 가지라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지난 18일 오후 일본 도쿄 분쿄구의 분쿄구민센터 2층 행사장. 야마다 아키라 메이지 대학 교수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교육 정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교학사의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에 맞서려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아베 정권의 보수적인 교육 정책과 입맛에 맞지 않는 진보적인 역사 교과서를 교육 현장에서 배제하려는 행정권력에 맞서는 치열한 전쟁이 이미 진행 중이다. 이날 모임은 그동안 이뤄진 저항운동의 성과를 점검하고 새로운 투쟁의 방안을 모색하려고 열린 보고대회다. 대회장 앞에는 “교육위원회의 생각과 다른 교과서는 쓸 수 없다고? 이것을 용인할 수 있습니까”라고 쓰인 표어가 걸려 있다.

일본 시민사회가 이번 싸움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다. 보수적인 도쿄도의 교육위원회가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교과서로 꼽히는 짓교출판의 <고교일본사A>의 기술 내용이 자기네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채택하지 못하도록 일선 학교에 압력 전화를 건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교과서는 도 교육위, 고등학교 교과서는 일선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해 왔지만, 느닷없이 도쿄도 교육위가 그런 원칙을 깨뜨리고 나선 것이다.

일부 교사들의 항의에 대한 도 교육위 회신은 엉뚱하게도 “짓교출판 교과서의 내용이 교육위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도 교육위를 불편하게 한 내용은 “국기·국가법과 관련해 히노마루(일본 국기)와 기미가요(일본 국가)가 침략전쟁에서 맡은 구실이나 사상·양심의 자유 등의 문제와 관련해 논란이 일었다. 정부는 이 법에 의해 국기 게양, 국가 제창 등을 강제하는 게 아니라고 국회 심의 과정에서 밝혔지만, 일부 지자체에선 공무원들에게 이를 강제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부분이었다. 도 교육위 쪽에선 지자체가 공무원들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에 불편함을 느낀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결성 이후 15년 동안 일본의 교과서 운동을 주도해 온 ‘아이들과 교과서 전국네트워크21’(이하 교과서넷)은 이를 일선 학교의 교육 자율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사태로 간주하고, 지난해 11월 ‘도 교육위의 고교 교과서 채택 방해를 허용하지 않은 실행위원회’(이하 실행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날 회의장엔 이번 사태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듯 일선 학교의 역사교사, 역사학자, 교과서 집필자, 출판 노조 관계자, 일반 시민 등 180여명이 참가했다.

일본의 교과서 운동은 현재 일본 시민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 9조 운동’(일본의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인한 헌법 9조를 지키려는 시민운동)과 함께 시민사회에 착실히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1962년 시작돼 무려 32년 동안 이어진 역사교육학자 이에나가 사부로의 ‘이에나가 재판’이었다. 3차에 걸친 이에나가 재판의 쟁점은 국가가 교과서 검정 제도를 통해 교과서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였다. 재판은 대체적으로 원고의 패소로 끝났지만, 긴 재판 과정에서 국가가 교과서를 통해 국민들의 생각을 통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사정 탓에 한국에선 최근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을 때 이를 검정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논의가 주류를 이뤘지만, 일본에선 그보다 이미 나온 교과서의 불채택 운동에 힘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2000년대 초반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일본 우익 세력이 역사 왜곡 교과서를 들고 나왔을 때도 일본 시민사회는 검정 강화보다는 불채택 운동을 펼쳐 이들 교과서의 확산을 막았다.

일본 시민사회가 우려하는 것은 일선 학교의 교과서 채택에 대한 도쿄도 교육위의 개입이 앞으로 일상화되리라는 점이다. ‘국가가 교과서를 통해 국민의 생각을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기존의 사회적 합의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다. 도 교육위는 지난 6월 2014년 교과서를 선정하는 과정에도 짓교출판의 <고교일본사A>(1학년용), <고교일본사B>(2~3학년용)의 기술이 도 교육위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견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러자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등 도쿄 주변의 다른 지자체들과 ‘위안부 망언’으로 악명 높은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의 거점 지역인 오사카부, 오사카시 등에서도 짓교출판 교과서를 밀어내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도쿄신문>은 18일 “결국 모든 도쿄도 내 도립학교에서 짓교출판 교과서를 선택한 곳은 한곳도 없었지만, 학교 현장에선 이 교과서를 높이 평가해 선정을 하려 애쓴 움직임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도쿄도 도립 고등학교의 교사로 실행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즈키 도시오는 “왜 지금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 살펴보면, 역시 아베 정권의 역사 인식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을 돌려놓겠다’는 구호를 들고 나와 승리했지만, 이는 단순히 민주당으로부터 일본을 돌려놓겠다는 게 아니라 (지난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롭게 살아온) 전후의 역사로부터 일본을 돌려놓겠다는 뜻”이라며 “전쟁을 직접 체험했거나 전쟁의 비참함을 어른들한테 직접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꿔 결국 일본을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바꾸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 시민사회는 교과서에 직접 손을 대려는 아베 정권의 움직임이 조만간 현실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자민당은 지난해 12월 중의원 선거 때 “많은 교과서에 지금도 자학사관이 있는 등 편향된 기술이 존재하고 있다”며 이런 교과서를 없앨 수 있도록 교과서 검정제도와 채택 제도를 바꾸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산케이신문>은 6월13일 아베 정부가 “역사 교과서에서 보이는 편향적인 기술을 수정하기 위해 교과서의 기술과 검정제도의 바람직한 방향을 포괄적으로 정하는 ‘교과서법’(가칭)을 만드는 검토를 시작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일본 시민단체들은 이 법이 만들어지면 교과서의 편집·검정·채택 등 모든 과정을 국가가 통제하게 돼 사실상 일본의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가 된다고 반발하고 있다. 교과서넷은 이 법이 자민당이 압도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는 국회에 상정되면 실제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를 막을 수 있는 항의 운동을 진행 중이다.

이날 모임에서 일본 교과서 운동 관계자들은 도 교육위의 ‘불법·부당한 행위’를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서명을 모으는 운동을 더 확대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 같은 싸움을 펼치고 있는 다른 지자체들이나 개헌 반대와 탈원전 등 다른 사회운동과도 힘을 합쳐 밑으로부터 풀뿌리 운동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야마다 교수는 “지금의 일본 사회의 모습은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키기 직전인 1920~1930년대와 불경기, 자연재해,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 등이 겹쳤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많다”며 “아베 정부의 교육 정책은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헌법을 지지하는 국민 만들기에 다름 아닌 만큼 이에 저항하는 일본 시민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도쿄/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지난 6월 도쿄도 교육원회로부터 ‘사용 부적절’ 판정을 받는 짓교출판의 <고교일본사>는 어떤 교과서일까.

이 교과서의 대표집필자인 가토 기미야키(63·사진) 도쿄가쿠에이대학 특임교수는 “이에나가 재판을 지원하던 교육자, 역사학 연구가들이 민주적 역사관에 기초해 오랫 동안 고민해 만든 교과서”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이 교과서의 역사관에 대해 “교과서도 역사서이기 때문에 역사를 꿰뚫는 시점이 없으면 아이들이 배울 수 없다”며 “우리 교과서의 기본적인 관점은 역시 민중 중시”라고 말했다. 즉 역사가 진보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국 민중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 문제가 되어 있는 (일본 국기와 국가에 대한) 기술도 하나의 문장에 불과하지만, 그 문장이 거기에 들어간 데는 우리들의 그런 역사관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 교과서는 고등학교 1학년용인 A와 2학년 이상이 배우는 B를 합쳐 매년 10만부 정도 팔렸지만, 도쿄도의 이번 개입을 계기로 많은 도립·현립 고등학교의 채택에서 배제되면서 전체적으로 판매가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가토 교수는 “도쿄도처럼 이런 역사관을 싫어하면서 민주, 평화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가려는 이들에게 이런 역사관은 어떻게든 부숴버려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힘들게 만든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사용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말을 맺었다.

도쿄/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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