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 이사장
[인터뷰] 기조연설 하는 하토야마 전 총리
“동아시아 공동체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일본 93대 총리를 지낸 하토야마 유키오(67)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 이사장이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그가 오랫동안 꿈꿔온 동아시아 공동체 실현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아베 정권의 안보 정책,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그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 경제·문화·교육·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협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한·일이 중심축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하토야마 이사장은 이를 위해선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피해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어떤 식의 사죄나 보상 방법이 좋을지 연구해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밖에 자신을 총리 사임으로 몰고 간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나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일본 관료기구와의 갈등 등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답변했다. 하토야마 이사장은 19일 부산에 도착해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한겨레-부산 심포지엄’에 기조 연설자로 참석할 예정이다.
경제·문화·교육·환경 등 분야
한·일 중심축 되어 협력할 필요
안전보장을 최종목표로 해야
일, 위안부 보상안 내야 진전 -2010년 6월에 총리직을 사임한 지 4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 “총리 시절 충분히 진행하지 못했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총리 경험자이자 민간인으로서 가능한 한 진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일본이 아시아의 한 국가로서 한국, 중국 국민들과 더 사이좋게 협력해 가길 바란다. 이를 위해 지난해 3월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를 통해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전 일본 총리)가 내세웠던 ‘우애’ 사상과 그에 근거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국, 중국, 베트남, 러시아, 말레이시아 등에 나가 설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 방송(니코니코 생방송)을 통해 매주 한번씩 특정 분야의 게스트를 초청해 저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 (주요 사회 이슈에 대해) 소책자를 만들어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번 한겨레-부산 심포지엄에서 기조 강연 주제도 동아시아 공동체다. “최근 들어 아시아의 성장이 세계 전체를 견인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라도 아시아는 지금보다 더 협력적이 되어야 한다. 지금 아시아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갈래다. 첫째는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들 때문에 관계가 악화되고 군사력을 강화해 가는 길이다. 또 하나는 서로가 차이를 극복하고 협력하면서 군사적 위협 수준을 낮추고, 경제·사회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협력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가운데 후자를 택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은 하나의 꿈이긴 하지만 유럽연합(EU)의 예에서 보듯 결코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중 사이에 긴장이 높아져 있고, 일-한 사이에도 아쉽게도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고 있다. 일-중 관계에선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와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장애가 되고 있다. 일-한 사이엔 야스쿠니 문제, 다케시마(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에 이어 최근엔 <산케이신문> 기자를 기소한 문제도 있었다. 이런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계 개선을 방해하는) 저해 요인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등에 대해 (기조 연설에서) 말씀드리려 한다.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선 여러 분야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쉬운 것은 경제다. 일·중·한의 경제는 어떤 의미에서 보완적이고 분업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공존공영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특히 한-미는 몇년 전, 한-중은 지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정상회의를 통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현재 일본이 여기서 빠져 있는데 이것은 일본에 바람직하지 않다. 그밖에 문화·교육·환경·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2009년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일·중·한 정상회담에서 제가 제의했던 ‘캠퍼스 아시아’ 구상이 있다. 일·중·한 대학끼리 학점 교환제를 만들어 서로 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면 이것을 상호 학점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다. 이런 것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안전보장의 공동체를 목표로 해야 한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동아시아 지역 전체가 ‘부전(不戰)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일·한이 축이 되어 공동체 구상을 진행해 갔으면 한다.” -당신의 정치철학의 뿌리는 우애의 사상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내용인가? “우애라는 것은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자’는 얘기다.(웃음) 인류에겐 ‘자유’라는 매우 중요한 사고방식과 ‘평등’이라는 이념이 있다. 자유가 지나치면 평등이 없어지고, 평등이 지나치면 자유가 방해를 받는다. 이 양자를 잘 조화시키자는 게 ‘인간 우선의 사상’, 즉 우애의 정신이다. 우애는 자유와 평등을 연결하는 다리인 것이다. 우애를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자립과 공존’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해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그와 동시에 타인의 존엄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두 같다면 세계는 재미없는 곳이 된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할 만한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자국과 타국이 다르기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역으로 사이좋게 서로 존경하면서 지낼 수 있다. 우애의 정신에 근거해 국가마다 다르다는 것을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서로 부족한 것을 도우며 가자는 발상이다. 이것을 일·중·한의 차원에서 보자면, 동아시아 공동체다. 이를 지구 전체로 넓히면 좋겠지만, 유럽엔 유럽연합이 있고, (북미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이 있기 때문에 일단 아시아에서 그런 것을 만들자는 게 동아시아 공동체다.” -그런 구상에 대해 반미적 색채가 짙다는 반발이 있었다. “나는 결코 반미가 아니다. 미국에서 6년 생활했고, 미국을 좋아하며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유럽연합처럼 참여와 비참여에 큰 차이가 발생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우선은 유연한 네트워크로 생각하는 게 좋지 않나 싶다. 특히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선 미국을 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분야별로 미국의 협력이 필요한 것과 꼭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나눠 미국의 참여가 필요 없으면 미국이 안 들어와도 된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매우 유연한 공동체다. 안에 들어간 사람들만 이익을 얻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배타적인 공동체의 사고방식을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앞으로 (아시아 재균형 정책 등을 통해) 아시아를 중시해 나가겠다고 선언할 때, 일부 정부 인사들이 (이 구상을) ‘앞으로 미국을 배제하는 게 아니냐’고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있다. 결코 그런 메시지를 던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오해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에 맞서면 안된다 생각하는
일 관료구조가 내 총리사임 원인
아베, 과거사에 겸허해질 필요
중 군사위협 등 외교로 풀어야 -현재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을 통해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아베 정권의 외교 정책은 19세기형의 낡은 발상이다. 세계는 정보화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가 되어 있다. 대국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전쟁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어떻게 외교 노력으로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분명히 중국의 군사적인 힘이 커지고 있으니까 중국에도 어떤 식의 자제를 요구할 필요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위협을 쓸데없이 부풀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과 함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고, 미국의 전쟁에 일본이 가담하는 것과 같은 방향성을 취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다. 중국이 위협이니까 자위대도 증강하고 오키나와에 있는 미 해병대의 후텐마 비행장을 옮길 비행장을 헤노코에 만들어야 한다는 강압적인 수단이 도드라진다. 군사적 힘을 키우는 게 아니라 어떻게 외교적인 노력으로 대화와 협의로 그런 위협을 줄여갈 것인가가 외교의 진수다. 나는 일본이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목표를 내건다면, 이 지역 국가들이 주변국들과 싸우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는 바보 같은 일은 없어질 것이라고 본다.” -당신이 총리 직에서 9개월 만에 사임하게 된 원인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였다. 이것이 정권의 명운을 걸 만큼 중요한 문제였나? “1996년 민주당을 처음 창당할 때부터 이른바 미군이 상주하지 않는, 필요할 때만 미국에 협력을 요구하는 안보 정책을 생각해왔다. 일본은 독립국가이기 때문에 일본 국내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늘 상주해 있다는 것은 결코 상식이 아니다. 이런 방향에서 생각하면 오키나와엔 미군기지가 너무 많다. 그 때문에 후텐마 비행장을 ‘최소한 오키나와 밖으로, 가능하면 외국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그게 미군이 상주하지 않는 안보 정책을 위한 일보 전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텐마 비행장을 어떻게든 헤노코가 아닌 최소한 현(오키나와) 밖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나의 실력 부족 등으로 원점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책임을 지고 총리 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여전히 후텐마 비행장은 미국과 협력을 통해 헤노코가 아닌 해외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오키나와 현민들의 뜻에 따라 활동하고 싶다.” -사임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이었나? “현실적으로 제 힘이 부족했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과 후텐마 비행장의 현외 이전 등을 언급한 게 직간접적으로 미국에 좋지 않게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의 관료기구, 특히 외무성, 방위성엔 미국에 거스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존재가 일본의 관료기구에 바람직하게 비춰지지 않았다는 게 진실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들이 미국의 힘을 사용해 호가호위한 것이겠지만,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여러 일을 했다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본인 자신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적절하지 않지만, 그런 점(관료기구의 저항)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처음부터 예상하며 대처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면 그건 맞는 지적이라 생각한다.” -2010년 5월 후텐마 비행장의 현외 이전을 포기하는 판단을 내리는데, 그로부터 두달 전 발생한 천안함 사건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나? “분명히 천안함 사건이 제 머릿속에 있었다. 천안함 사건 뒤에 이명박 대통령과도 만났다.(2010년 5월29일 한-일 정상회담) 동북 아시아에서 북한이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 매우 불안정한 요소가 있었다는 게 사실이다. 그로 인해 역시 안전보장을 강화해야 한다는 발상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은 사실이다.” -아베 정권의 역사 인식 등으로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저지른 행동이 아니어도 과거 일본의 선배들이 한 행위에 대해, 특히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늘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역사적인 사실에 눈을 감고 우리가 과거에 한 전쟁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정당화하는 것이 피해자들의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깨달을 필요가 있다. 아베 총리 등은 어떤 의미에서 과거의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자위대 군복을 입고 전차에 타는 행동을 보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 문제에 대해) 인간으로서 겸허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상처받은 분들의 마음을 가능한 한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일본은 1995년 무라야마 정권 때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들어 관민 협력의 방식을 통해 위로금을 제공하는 발상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엔 여러 문제가 겹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고령이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은 상황을 생각한다면 해결을 서둘러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어떤 식의 사죄나 보상의 방법이 좋을지 일본 정부가 연구해 뭔가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무라야마 정권 때 어느 정도 시행한 것이 있고, 이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인들도 있다. 그런 것을 고려하면서 (아시아여성기금으로는) 뭐가 부족했는지 서로 배우면서 해답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물론 지금의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결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선 나도 동감이다.” -앞으로 정치 일선에 복귀할 계획은? “나도 나이가 들었다. 아베 정권에 맞서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대항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난 총리까지 지냈고, 정계에서 은퇴한 사람이다. 앞으로는 다음 세대에 대한 지도와 인재 육성 활동에 전념할 예정이다. 또 일본을 ‘더 매력 있는 곳’으로 바꿔가기 위한 활동에 꾸준히 참여하고 싶다.” 도쿄/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하토야마는 2009년 자민당에 역사적 승리 뒤 총리에
2013년부터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 활동 1947년 2월 도쿄 출생. 1955년 자민당을 창당한 하토야마 이치로(1883~1959) 전 총리가 조부다. 1969년 도쿄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중의원에 당선된 뒤 2012년 12월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8선 의원을 지냈다. 1993년 일본 제1야당인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고, 2009년 8월 자민당을 무너뜨린 역사적인 총선 승리로 93대 총리에 취임했다. 총리 시절 동아시아 공동체론을 역설했지만, 오키나와의 주일 미군기지인 후텐마 비행장의 이전 등을 둘러싸고 미국의 견제와 일본 관료기구내 보수파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9개월 만에 사임했다. 지난해 3월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를 창립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한·일 중심축 되어 협력할 필요
안전보장을 최종목표로 해야
일, 위안부 보상안 내야 진전 -2010년 6월에 총리직을 사임한 지 4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 “총리 시절 충분히 진행하지 못했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총리 경험자이자 민간인으로서 가능한 한 진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일본이 아시아의 한 국가로서 한국, 중국 국민들과 더 사이좋게 협력해 가길 바란다. 이를 위해 지난해 3월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를 통해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전 일본 총리)가 내세웠던 ‘우애’ 사상과 그에 근거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국, 중국, 베트남, 러시아, 말레이시아 등에 나가 설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 방송(니코니코 생방송)을 통해 매주 한번씩 특정 분야의 게스트를 초청해 저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 (주요 사회 이슈에 대해) 소책자를 만들어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번 한겨레-부산 심포지엄에서 기조 강연 주제도 동아시아 공동체다. “최근 들어 아시아의 성장이 세계 전체를 견인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라도 아시아는 지금보다 더 협력적이 되어야 한다. 지금 아시아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갈래다. 첫째는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들 때문에 관계가 악화되고 군사력을 강화해 가는 길이다. 또 하나는 서로가 차이를 극복하고 협력하면서 군사적 위협 수준을 낮추고, 경제·사회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협력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가운데 후자를 택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은 하나의 꿈이긴 하지만 유럽연합(EU)의 예에서 보듯 결코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중 사이에 긴장이 높아져 있고, 일-한 사이에도 아쉽게도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고 있다. 일-중 관계에선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와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장애가 되고 있다. 일-한 사이엔 야스쿠니 문제, 다케시마(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에 이어 최근엔 <산케이신문> 기자를 기소한 문제도 있었다. 이런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계 개선을 방해하는) 저해 요인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등에 대해 (기조 연설에서) 말씀드리려 한다.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선 여러 분야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쉬운 것은 경제다. 일·중·한의 경제는 어떤 의미에서 보완적이고 분업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공존공영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특히 한-미는 몇년 전, 한-중은 지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정상회의를 통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현재 일본이 여기서 빠져 있는데 이것은 일본에 바람직하지 않다. 그밖에 문화·교육·환경·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2009년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일·중·한 정상회담에서 제가 제의했던 ‘캠퍼스 아시아’ 구상이 있다. 일·중·한 대학끼리 학점 교환제를 만들어 서로 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면 이것을 상호 학점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다. 이런 것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안전보장의 공동체를 목표로 해야 한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동아시아 지역 전체가 ‘부전(不戰)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일·한이 축이 되어 공동체 구상을 진행해 갔으면 한다.” -당신의 정치철학의 뿌리는 우애의 사상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내용인가? “우애라는 것은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자’는 얘기다.(웃음) 인류에겐 ‘자유’라는 매우 중요한 사고방식과 ‘평등’이라는 이념이 있다. 자유가 지나치면 평등이 없어지고, 평등이 지나치면 자유가 방해를 받는다. 이 양자를 잘 조화시키자는 게 ‘인간 우선의 사상’, 즉 우애의 정신이다. 우애는 자유와 평등을 연결하는 다리인 것이다. 우애를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자립과 공존’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해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그와 동시에 타인의 존엄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두 같다면 세계는 재미없는 곳이 된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할 만한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자국과 타국이 다르기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역으로 사이좋게 서로 존경하면서 지낼 수 있다. 우애의 정신에 근거해 국가마다 다르다는 것을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서로 부족한 것을 도우며 가자는 발상이다. 이것을 일·중·한의 차원에서 보자면, 동아시아 공동체다. 이를 지구 전체로 넓히면 좋겠지만, 유럽엔 유럽연합이 있고, (북미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이 있기 때문에 일단 아시아에서 그런 것을 만들자는 게 동아시아 공동체다.” -그런 구상에 대해 반미적 색채가 짙다는 반발이 있었다. “나는 결코 반미가 아니다. 미국에서 6년 생활했고, 미국을 좋아하며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유럽연합처럼 참여와 비참여에 큰 차이가 발생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우선은 유연한 네트워크로 생각하는 게 좋지 않나 싶다. 특히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선 미국을 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분야별로 미국의 협력이 필요한 것과 꼭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나눠 미국의 참여가 필요 없으면 미국이 안 들어와도 된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매우 유연한 공동체다. 안에 들어간 사람들만 이익을 얻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배타적인 공동체의 사고방식을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앞으로 (아시아 재균형 정책 등을 통해) 아시아를 중시해 나가겠다고 선언할 때, 일부 정부 인사들이 (이 구상을) ‘앞으로 미국을 배제하는 게 아니냐’고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있다. 결코 그런 메시지를 던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오해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에 맞서면 안된다 생각하는
일 관료구조가 내 총리사임 원인
아베, 과거사에 겸허해질 필요
중 군사위협 등 외교로 풀어야 -현재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을 통해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아베 정권의 외교 정책은 19세기형의 낡은 발상이다. 세계는 정보화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가 되어 있다. 대국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전쟁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어떻게 외교 노력으로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분명히 중국의 군사적인 힘이 커지고 있으니까 중국에도 어떤 식의 자제를 요구할 필요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위협을 쓸데없이 부풀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과 함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고, 미국의 전쟁에 일본이 가담하는 것과 같은 방향성을 취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다. 중국이 위협이니까 자위대도 증강하고 오키나와에 있는 미 해병대의 후텐마 비행장을 옮길 비행장을 헤노코에 만들어야 한다는 강압적인 수단이 도드라진다. 군사적 힘을 키우는 게 아니라 어떻게 외교적인 노력으로 대화와 협의로 그런 위협을 줄여갈 것인가가 외교의 진수다. 나는 일본이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목표를 내건다면, 이 지역 국가들이 주변국들과 싸우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는 바보 같은 일은 없어질 것이라고 본다.” -당신이 총리 직에서 9개월 만에 사임하게 된 원인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였다. 이것이 정권의 명운을 걸 만큼 중요한 문제였나? “1996년 민주당을 처음 창당할 때부터 이른바 미군이 상주하지 않는, 필요할 때만 미국에 협력을 요구하는 안보 정책을 생각해왔다. 일본은 독립국가이기 때문에 일본 국내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늘 상주해 있다는 것은 결코 상식이 아니다. 이런 방향에서 생각하면 오키나와엔 미군기지가 너무 많다. 그 때문에 후텐마 비행장을 ‘최소한 오키나와 밖으로, 가능하면 외국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그게 미군이 상주하지 않는 안보 정책을 위한 일보 전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텐마 비행장을 어떻게든 헤노코가 아닌 최소한 현(오키나와) 밖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나의 실력 부족 등으로 원점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책임을 지고 총리 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여전히 후텐마 비행장은 미국과 협력을 통해 헤노코가 아닌 해외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오키나와 현민들의 뜻에 따라 활동하고 싶다.” -사임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이었나? “현실적으로 제 힘이 부족했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과 후텐마 비행장의 현외 이전 등을 언급한 게 직간접적으로 미국에 좋지 않게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의 관료기구, 특히 외무성, 방위성엔 미국에 거스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존재가 일본의 관료기구에 바람직하게 비춰지지 않았다는 게 진실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들이 미국의 힘을 사용해 호가호위한 것이겠지만,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여러 일을 했다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본인 자신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적절하지 않지만, 그런 점(관료기구의 저항)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처음부터 예상하며 대처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면 그건 맞는 지적이라 생각한다.” -2010년 5월 후텐마 비행장의 현외 이전을 포기하는 판단을 내리는데, 그로부터 두달 전 발생한 천안함 사건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나? “분명히 천안함 사건이 제 머릿속에 있었다. 천안함 사건 뒤에 이명박 대통령과도 만났다.(2010년 5월29일 한-일 정상회담) 동북 아시아에서 북한이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 매우 불안정한 요소가 있었다는 게 사실이다. 그로 인해 역시 안전보장을 강화해야 한다는 발상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은 사실이다.” -아베 정권의 역사 인식 등으로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저지른 행동이 아니어도 과거 일본의 선배들이 한 행위에 대해, 특히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늘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역사적인 사실에 눈을 감고 우리가 과거에 한 전쟁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정당화하는 것이 피해자들의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깨달을 필요가 있다. 아베 총리 등은 어떤 의미에서 과거의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자위대 군복을 입고 전차에 타는 행동을 보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 문제에 대해) 인간으로서 겸허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상처받은 분들의 마음을 가능한 한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일본은 1995년 무라야마 정권 때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들어 관민 협력의 방식을 통해 위로금을 제공하는 발상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엔 여러 문제가 겹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고령이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은 상황을 생각한다면 해결을 서둘러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어떤 식의 사죄나 보상의 방법이 좋을지 일본 정부가 연구해 뭔가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무라야마 정권 때 어느 정도 시행한 것이 있고, 이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인들도 있다. 그런 것을 고려하면서 (아시아여성기금으로는) 뭐가 부족했는지 서로 배우면서 해답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물론 지금의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결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선 나도 동감이다.” -앞으로 정치 일선에 복귀할 계획은? “나도 나이가 들었다. 아베 정권에 맞서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대항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난 총리까지 지냈고, 정계에서 은퇴한 사람이다. 앞으로는 다음 세대에 대한 지도와 인재 육성 활동에 전념할 예정이다. 또 일본을 ‘더 매력 있는 곳’으로 바꿔가기 위한 활동에 꾸준히 참여하고 싶다.” 도쿄/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하토야마는 2009년 자민당에 역사적 승리 뒤 총리에
2013년부터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 활동 1947년 2월 도쿄 출생. 1955년 자민당을 창당한 하토야마 이치로(1883~1959) 전 총리가 조부다. 1969년 도쿄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중의원에 당선된 뒤 2012년 12월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8선 의원을 지냈다. 1993년 일본 제1야당인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고, 2009년 8월 자민당을 무너뜨린 역사적인 총선 승리로 93대 총리에 취임했다. 총리 시절 동아시아 공동체론을 역설했지만, 오키나와의 주일 미군기지인 후텐마 비행장의 이전 등을 둘러싸고 미국의 견제와 일본 관료기구내 보수파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9개월 만에 사임했다. 지난해 3월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를 창립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