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잠수함이 히로시마현 구레에 정박해 있다. 전날인 11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현직 장관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을 방문했다. 미국은 2차대전 당시 일본 군수산업 중심지 중 하나였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구레에는 지금도 해상자위대 기지가 있다. 구레/AFP 연합뉴스
“히로시마에 와 놓고도 피폭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싫은) 얘길 듣고 싶지 않은 것일테지.”(히라오카 다케시 전 히로시마 시장)
11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역사적인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방문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기묘하게 갈렸다. 71년 전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미국의 현직 국무장관이 히로시마를 방문한 것 자체는 환영할 일이지만, 피폭자들과 만나는 대화의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고 ‘사죄’도 하지 않는 등 일본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8살 때 피폭을 당한 뒤 자신의 체험을 전하는 활동을 이어온 오구라 게이코(78)의 반응이 대표적이다. 그는 <엔에이치케이>(NHK) 방송 인터뷰에서 “이번 방문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이 히로시마를 방문하는데) 왜 7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나. 여기에 와도 미국이 피폭자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시민은 “케리 장관을 만나 ‘원폭 투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싶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히로시마 시민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본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평범한 일본인은 전쟁의 ‘피해자’이지 가해자가 아니다”는 집단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히로시마 시민들은 그런 이유로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 미국 대통령이 언젠가 히로시마를 방문해 사죄해야 한다’며 오랫동안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추진해 왔다. 이런 현지 정서를 반영하듯 일본 언론들은 12일 “피폭지의 반응은 교착(엇갈려)”(<아사히신문>), “피폭자들, ‘체험을 들었어야 한다’는 주문도”(<마이니치신문>) 등의 기사를 내보냈다. 일본은 한쪽에선 히로시마의 피해 사실을 내세우면서, 다른 한쪽에선 핵무기 6000발을 만들 수 있는 엄청난 플루토늄을 보유하는 일견 모순적인 핵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남은 문제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5월 말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마친 뒤 현장을 찾을지 여부다. 케리 장관은 11일 방문 직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모두가 히로시마에 와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 되길 바란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현장을 찾길 바란다는 개인적인 희망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을 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방문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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