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평화기념공원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일본 학생들이 한국인 피폭자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히로시마/연합뉴스
일본 법무성 산하의 지방법무국이 원자폭탄에 피폭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조선인 징용자 명부를 폐기 처분한 사실이 확인됐다.
<마이니치신문>은 8일 나가사키지방법무국이 2차대전 중 한반도에서 강제징용된 3400명의 미지급 임금 공탁명부를 지난 1970년에 폐기처분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미지급 임금 공탁명부에 올라있는 조선인 3400명은 1945년 8월9일 미군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당시 피폭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정부는 피폭자에게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부해 의료비와 간병비 등을 주고 있는데,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부받기 위해서는 피폭을 당했다는 근거가 필요하다. 일본 기업들은 징용 등으로 일본에서 일했으나 해방 뒤 귀국한 조선인들의 경우 소재 파악이 어렵다는 이유로 미지급 임금을 공탁했고, 공탁 때 명부를 첨부했다. 미지급 임금 공탁명부는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경우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부받기 위한 결정적인 증거 자료다.
나가사키지방법무국이 자료를 없애 버렸다는 사실이 그나마 드러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투쟁과 일본 시민단체의 지원 때문이었다. 일본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는 한국인 징용자 3명의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부받기 위해, 지난 5월부터 미지급 임금 공탁명부 공개를 나가사키지방법무국에 요구했다. 나가사키지방법무국은 지난달 공문으로 공탁 명부가 1970년 3월 보존기간이 만료되어 폐기되었다고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에 회신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 정부 방침에도 어긋나는 조처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법무성은 1958년 전후 처리 미해결을 이유로 한반도 출신 징용자의 미지급 임금은 공탁 뒤 채권 소멸시효인 10년이 지나도 국고에 넣지 말 것, 이미 국고에 넣었을 경우 관련 서류를 보존하라고 통지했다. 피폭자 지원단체는 “피폭자가 지원 받을 권리를 국가가 빼앗은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2010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펴낸 자료에 따르면, 원폭에 피폭된 조선인 숫자는 히로시마에서 5만명, 나가사키에서 2만명으로 추정된다. 사망자는 히로시마에서 3만명, 나가시키에서 1만명으로 추정된다. 피폭자 중 2만명 이상은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귀국한 피폭자들은 일본 정부의 치료비 지원에서도 차별을 받아왔다. 일본 정부는 1957년 3월 피폭자들의 치료를 지원하기 위한 ‘원폭 피해자의 의료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다. 법률엔 치료 대상을 일본인으로 한정한다는 ‘국적 조항’은 없었지만, 지원 범위를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한정해 사실상 한국인 등 외국인을 배제했다.
조선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차별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어린 시절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손진두씨가 1970년 피폭 치료를 받기 위해서 일본에 밀항해 법정 투쟁을 벌이면서부터다. 이후 한반도 출신 원폭 피해자에 대한 차별은 조금씩 사라졌다. 지난 2015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유족 3명이 일본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치료비를 일부만 지급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일본 오사카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치료비를 전액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한국 정부도 피폭자 지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왔다. 한국 국회에서는 원폭 투하 71년만인 지난해에야 피폭자 의료 지원 등을 담은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마이니치신문>은 피폭자 건강수첩 발부를 신청한 김성수(91)씨, 배한섭(94)씨, 이관모(94)씨가 향후 이와 관련한 법적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전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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