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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홋카이도 탄광마을에 조선 여성 있는 산업위안소 있었다”

등록 2017-08-14 19:13수정 2017-08-15 00:31

[르포] 아시베쓰에 남은 슬픈 역사의 흔적

언덕위 ‘위안소’로 썼던 건물 남아
주민들 “치마저고리 입은 4~5명”
조선인 상대 성매매 내몰린 현장

일제 강제동원 조선노동자들
‘지옥노동’ 끝에 도주 속출하자
미쓰이 등 재벌기업 적극 개입
일본 전역 곳곳에 ‘위안소’ 개설

식민통치 말단의 피해자 여성들
어떤 경로로 와서 어디로 갔는지
기록도 거의 남지 않은 채 묻혀
호시노후루사토 백년기념관 하세야마 다카히로 관장이 11일 홋카이도 아시베츠시에 남아있는 산업위안소 건물(가운데 안쪽) 앞에 서 있다. 하세야마 관장은 위안소 건물은 원래 크기의 3분의 1정도로 축소되어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호시노후루사토 백년기념관 하세야마 다카히로 관장이 11일 홋카이도 아시베츠시에 남아있는 산업위안소 건물(가운데 안쪽) 앞에 서 있다. 하세야마 관장은 위안소 건물은 원래 크기의 3분의 1정도로 축소되어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상점 뒤에 작은 집이 보이지요. 그곳이 원래 산업위안소였습니다. 지금은 원래 면적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11일 일본 홋카이도 아시베쓰의 향토 박물관인 호시노후루사토(별이 내리는 고향) 백년기념관의 하세야마 다카히로 관장은 언덕 위의 작은 집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금은 민가로 변한 이 빨간 지붕 건물이 홋카이도에 남은 유일한 ‘산업위안소’ 흔적이다.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 탄광 등에 강제동원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는 일이 속출하자, 조선인 여성을 모아 성매매를 강요하는 이른바 ‘산업위안소’를 만들었다. 일본의 대표적 재벌기업 미쓰이가 1992년까지 탄광을 운영했던 아시베쓰에 산업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이 60년대부터 증언을 하면서 조금씩 알려졌지만, 이곳으로 끌려왔던 여성들의 목소리나 그들의 구체적 사연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978년 이 지역 고교 교사였던 스기야마 시로는 탄광에서 근무한 조선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증언했다. 1942년부터 아시베쓰탄광에서 일했던 조선인은 스기야마에게 “강 건너에 위안소가 있었고 위안부 4~5명이 있었다. 전부 조선 여자들이었다. 벌이가 좋은 광부에게 할인권이 나왔다. 벌이가 좋았다는 것은 한달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일했다는 뜻이다”라고 털어놨다.

아시베쓰탄광 조선인 기숙사가 있던 곳은 강 하류로, 위안소에 가려면 다리를 건너 약 3㎞를 걸어야 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건넜던 다리는 지난해 폐쇄됐지만 낡은 모습을 간직한 채 아직 남아 있다.

하세야마 관장은 2003년 아시베쓰탄광에서 일했던 일본인 마에다 요시미쓰에게서 위안소의 존재를 다시 확인했다. 마에다는 “조선인 여성이 있는 위안소가 있었다. 위안소 옆에는 광장이 있었다. 만약 내가 징병 대상이었으면 나도 그곳에 놀러 갔었을지 모른다”고 증언했다.

11일 홋카이도 아시베쓰시에 폐쇄된 다리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이 다리를 이용해 위안소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11일 홋카이도 아시베쓰시에 폐쇄된 다리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이 다리를 이용해 위안소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2006년 위안소 앞에 있던 아사카상점의 딸인 아사카 시즈에한테도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1944년 고등학생 때 봄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와 보니, 집 옆에 있던 탄광 독신자용 기숙사가 어느 순간 조선요리점(위안소)이 돼 있었다. 거기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 4~5명이 있었다. 그중 한명이 손짓 발짓으로 옷 수선을 부탁해 들어준 적이 있다. 1945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위안소가 있었는데 전후 어느 순간 없어졌다”고 말했다.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아시베쓰탄광에는 1944년께 산업위안소가 만들어졌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인 1945년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산업위안소는 일본 정부의 묵인 또는 조장하에 기업이 업자에게 의뢰해 만드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산업위안소는 규슈와 후쿠시마, 홋카이도 등 탄광 채굴과 토목공사 등이 벌어진 일본 전역에 세워졌고, 일본 남부 등 재일 조선인이 비교적 많았던 지역에서는 기존 조선요리점을 업체가 활용하는 방식이 많았다. 후쿠시마현과 이바라키현에 걸쳐 있는 조반탄광의 노무관리자가 “회사가 매춘을 하는 곳을 지정했다. 조선 여성들이 상대해줬다”고 회상한 기록이 남아 있다.

11일 홋카이도 아시베쓰시에 태평양전쟁 뒤 석탄 운송을 위해 만든 다리가 보인다. 다리 밑 하천에서 조선인 노동자 유골 발굴 작업이 2005년에 벌어졌다.
11일 홋카이도 아시베쓰시에 태평양전쟁 뒤 석탄 운송을 위해 만든 다리가 보인다. 다리 밑 하천에서 조선인 노동자 유골 발굴 작업이 2005년에 벌어졌다.
홋카이도에서는 일본 기업이 적극적으로 관여한 정확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개척지’였던 홋카이도 거주 조선인이 전체 재일 조선인 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34년 1.7%에 불과했으나 39년 ‘국민징용령’을 통해 이곳으로 강제징용한 조선인 노동자가 급증하면서 42년엔 4.1%로 늘어났다. 기업은 조선인 남성들이 급증하자 적극적으로 개입해 위안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홋카이도탄광기선이 운영한 유바리탄광에서는 기업이 업자에게 위안소 건물을 무상 대여하고 물자까지 배급했다.

하세야마 관장은 “미쓰이가 아시베쓰탄광 위안소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었지만 없앤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미쓰이는 지역 탄광회사인 아시베쓰탄광으로부터 1944년 탄광을 인수하면서 땅과 시설을 모두 매수했다. 미쓰이 허가 없이 위안소를 운영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사카상점의 아사카 시즈에도 위안소 앞 건물에 미쓰이아시베쓰탄광 노무관리계 직원이 살았다고 증언했다. 직원이 살았던 곳은 위안소가 있던 건물에서 1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미쓰이아시베쓰탄광의 노무관리계가 위안소 운영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인 기숙사는 이제 사람 키를 넘는 잡초가 무성한 곳으로 변했다. 지금 주민 공동목욕탕이 들어선 길목에는 당시 파출소가 있었다. 경찰이 조선인 노동자가 어디에 가는지를 감시했다.

아시베쓰탄광에는 1944년 6월 조선인 1905명과 중국인 760명, 연합군 포로 609명이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돈벌이가 된다는 꼬임에 넘어가 일본으로 온 이들과 1939년 ‘국민징용령’ 이후 강제징용된 이들이었다. 노동은 혹독했다. 조선인 51명이 사고와 병으로 숨졌다. 2012년 일본과 한국 시민단체는 하천변에 조선인 노동자를 암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전직 탄광 직원의 증언에 근거해 발굴조사를 한 적이 있으나 유골은 발견하지 못했다. 조사팀은 강이 범람했을 때 유골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했다.

아시베쓰 위안소의 조선 여성들이 어떤 경로로 홋카이도까지 왔고, 위안소가 폐쇄된 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치마저고리를 입었고 손짓 발짓으로 옷 수선을 부탁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조선 출신으로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이들로 추정할 수 있다. 머나먼 홋카이도의 탄광에서 혹독한 노동을 한 조선인들, 일본 당국이 그들의 노동을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동원한 조선 여성들은 일본 식민통치의 가장 말단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들의 비극은 기록도 제대로 남지 않은 채 희미한 흔적으로만 이곳에 남아 있다.

아시베쓰(홋카이도)/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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