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8월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 피해자 추모비 앞에서 재일동포들과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이 1945년 8월 원폭 투하에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모하고 있다. 나가사키/안관옥 기자
일본 법원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한국인들의 유족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서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부터 ‘제척기간 경과’를 돌연 주장하고 나섰는데, 일본 법원이 이 주장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오사카지방재판소는 31일 1975~95년 사망한 ‘재외 피폭자’들의 유족 약 150명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재외 피폭자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유족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외 피폭자’란 일본에 살고 있지 않은 원폭 피해자를 뜻하는 말로, 일제 때에 징용 등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끌려갔다가 원폭에 피폭된 한국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일본 정부는 2차대전 패전 뒤인 1957년 3월 원폭 피폭자들의 치료를 지원하기 위한 ‘원폭 피해자의 의료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1974년부터 의료비 지원 대상(월 약 3만4천엔)을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한정했다. 같은 피폭자이지만 해방 뒤 한국으로 돌아간 한국인들은 사실상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조처는 2003년까지 이어졌다.
일본 정부의 차별적 조처에 대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이를 지원하는 시민단체의 투쟁이 수십년간 이어졌고,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 2007년 일본 정부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1인당 120만엔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뒤 일본 정부는 원폭 피폭 사실이 입증되기만 하면 재판상 화해를 통해 손해배상에 응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9월까지 약 6천명과 화해를 하고 손해배상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난해 갑자기 민법상 불법행위가 벌어진 시점부터 20년이 지나면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된다는 규정인 제척기간을 주장하며, 화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당시 갑자기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선 데 대해 “제척기간 경과를 인식한 것은 (올해) 봄이었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유족들이 “(사망한 지) 20년이 지났다고 해서 국가가 배상 책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현저히 정의에 반한다”고 반발했으나, 제척기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사카지방재판소는 31일 제척기간이 경과했지만 화해를 통해 배상을 받은 이들이 이미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정부가 부주의했다”면서도, “(일본 정부의 제척기간 주장이) 공평성에 반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일본 법원이 한국인 피폭자 유족과 화해를 거부하는 일본 정부의 방침을 추인한 꼴이 됐다. 비슷한 재판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도 진행 중이어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정부가 돌연 제척기간 경과를 주장하고 나선 배경에는 아베 신조 정부 들어서 급격해진 일본 사회 우경화와 한-일 관계 악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신문>은 31일 일본 정부가 2022년부터 실시되는 새로운 고교 학습지도요령에 영토와 안보를 교육하는 ‘공공’(公共)을 공민(일반사회) 분야의 필수과목으로 신설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공공 과목은 ‘다양한 선택·판단을 할 때 활용할 개념과 이론, 공공적인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이해하기 위한 과목’으로, 여기서 ‘공공적인 공간’은 영토를 뜻한다. 독도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일본이 주변국과 영토 분쟁 중이거나 영토 분쟁을 노리는 지역이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학생들에게 더욱 강하게 교육시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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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