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중의원회관에서 열린 BC급 전범 피해 해결 모임에서 동진회 회장 이학래씨가 발언하고 있다.
“한일의원연맹 선생님들은 이번 국회 회기에서는 (BC급 전범 피해자 명예회복 입법이) 되지 않았지만 다음 회기에서는 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셨다. 사형을 당한 동료들, (사형은 당하지 않았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이번 국회에서는 꼭 부탁드린다.”
3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중의원회관에서 열린 BC급 전범 피해 해결 모임에서 93살 이학래씨는 가늘고 작은 목소리로 호소했다. 이씨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포로감시원이 되었다가, BC급 전범(포로학대, 약탈 등을 저지른 사람들이나 상급자의 명령에 의하여 고문과 살인을 한 혐의가 있는 사람)으로 몰린 이다. 전남 보성 출신 이씨는 17살 때 돈 많이 벌게 해 준다는 ‘포로감시원’ 모집 공고에 넘어가 선발된 3000여 조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후 타이의 일본군 철도공사장과 일본군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말단 관리자로 일한 그는 일제 패전과 함께 BC급 전범자가 됐다. 포로 감시원들은 군속으로 이등병보다도 위치가 낮았지만, 연합군 포로들을 직접 접촉했던 탓에 원망을 뒤집어 쓰는 경우가 많았다. 연합군이 연 전범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한반도 출신 군속은 148명인데, 이중 23명이 사형을 당했다. 이씨도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이후 감형돼서 도쿄 스가모형무소에서 1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처벌받을 때는 일본인으로 처리되었으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로 더이상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후 일본 정부의 보상에서는 제외되는 부조리를 겪었다.
이씨는 1995년 4월 동료들과 함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해 ‘동진회’(同進會)라는 단체를 결성해 명예회복 운동을 시작했다. 이달로 결성 63년째다. 동진회는 명예회복을 위해서 1956년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부터 수많은 정부 관계자들과 면담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소송을 냈지만 일본 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1999년 최고재판소 패소 판결 뒤에는 일본 국회에서 명예회복 법률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전환했다. 2016년 한일의원연맹 차원에서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혔으나, 아직 입법은 되지 않고 있다.
63년의 세월 동안 이씨와 동료들은 이국 땅에서 힘든 세월을 보내왔다. 동진회 회원도 이제 몇명 남지 않았다. 이씨는 “1956년 스가모형무소에서 석방되었지만 형제도 아무도 없는 이국인 일본에 버려진 셈이었다. 동료 중에는 정신병에 걸려 자신이 일본에 있는 줄도 모르고 불꽃놀이를 함포사격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고 말했다.
3일 모임에 참석한 기타무라 세이고 자민당 의원은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 (입법) 실현을 위해서 애쓰겠다. 자민당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공감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모임에는 최근 호세이대학 학생들이 만든 BC급 전범 피해자 관련 영상도 상영됐다. 민진당의 가미모토 미에코 의원은 “이런 사실을 일본의 학생들이 교과서로 배우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대학생들이 이 문제로 영상을 만든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